최고가 아닌,

by 단어

오늘에 딱 맞는 노래가 있다. 요란한 전주로 시작되어 감미로운 목소리가 나오는, 가사도 멜로디도 기승전결이 완벽한 노래. 원필의 행운을 빌어 줘를 재생시킨다. 자 이제는 기나긴 모험을 시작할 시간. 준비했던 짐을 메고 현관문을 열 시간…. 내 발 앞에 그려진 출발선 이젠 딛고 나갈 준비가 된 거야. 가사도 멜로디도 과하게 희망적이고 벅차올라서 평소에는 잘 듣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 행운이 필요하다. 행운을 빌어줄 사람도 필요하다. 인턴 면접을 보는 날이기 때문이다.


면접이란 무엇인가.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자기소개를 빙자한 자기소설을 한 후 어떤 질문이든 빠릿빠릿하게 대답해야 하며 면접관에게 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이 일에 딱 맞는 최고의 사람임을 끊임없이 어필해야 하는 자리. 담백하기 보다는 뭐든 좀 과한 자리. 과하게 나를 표현해야 하는 자리.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수없이 했던 자기소개와 돌발 질문에 대처하는 연습과 총명해 보이는 눈빛과 표정은 잊은 지 오래다. 그때는 꽤 뻔뻔하게 거짓말을 잘했던 것 같은데…. 1도 도움 안 되는 고민 따윈 멈추고 면접 자료나 한 번 더 읽기로 한다.


다행히 10분 전에 도착했다. 조금 일찍 도착하는 건 면접을 보는 사람의 도리이다. 면접장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배가 아플 수도 있고, 입술에 묻어있어야 할 틴트가 이에 묻지 않았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면접관이 나의 답변이 아니라 핑크빛으로 물든 이에 집중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첫인상을 준다. 동아리 면접부터 아르바이트 면접. 그 어떤 면접이든 10분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으면 성실하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이번 자리는 인터뷰 형식으로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먼저 이름과 나이, 요즘 관심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처음 질문부터 당황스럽다. 따로 준비해 온 자기소개가 있었는데 이름과 나이 관심사에 대해 말하라고? 몇 날 며칠 동안 외우고 고치고를 반복한, 몇 년간 갈고 닦은 문장력과 필살기를 총동원해서 쓴 자기소개가 아니라?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굴리며 전혀 당황하지 않은 척한다. 그리고 아주 평범하디 평범한 이름과 나이에 대해서, 최근 나의 관심사(는 아무래도 취업이었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글은 돈이 안 되고 그렇다고 학점도 썩….)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물론 괄호 안의 표현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고급스럽고 있어보이게 나를 포장한다.


그 다음부터 이어진 질문과 답변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제법 잘 대답한 것도 있었고 아 조졌다 싶은 것도 있었다. 30분간 진행된 면접을 끝내고 면접장에서 나오자 허벅지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흐물거리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지하철로 향한다. 하필 이럴 때 나의 애인은 연락을 보지 않는다. 어디든 이 감정과 긴장을 떨쳐내고 싶은 마음에 에어팟을 꽂고 행운을 빌어주는 원필의 목소리를 듣는다. 앞으로 총 몇 번의 몇 번의 희망과 그리고 또 몇 번의 몇 번의 절망과 차가운 웃음 혹은 기쁨의 눈물을 맛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 교회에서 나눴던 대화가 생각난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이요."

"왜요?"

"사람에게는 희로애락이 있잖아요. 계속 변하는 게…. 아름다워요."

"오…. 그런데 희와 락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노와 애도 있잖아요."

"그래서…. 아름다운 거 아닐까요? 좋은 것만 계속 있으면 그게 좋은지 모르니까요."


저렇게 답한 나는 무언가 간절한 게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부디 희와 락만 있기를 바란다. 좋은 것만 계속 있는 세상이 제일 아름다울 것만 같다. 기쁨의 눈물만 흘리고 싶다.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를 최고로 만들기도 하고 가장 약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 애한테서 전화가 온다. 왜 바로 전화를 받지 않으냐고 투정을 부리는 나에게 얘는 수고했다고만 얘기한다. 면접이 어땠는지, 붙을 것 같은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는다. 모든 게 낯설었던 곳에서 익숙한 애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서야 두근거렸던 심장이 가라앉는다.


사랑하는 내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응원을 등에 업고서. 내 발 앞에 그려진 출발선. 이젠 딛고 나아갈 그때가 온 거야. 출발선에 서 있는 나도, 출발선을 딛고 나아가는 나도 최고가 아닌 나이다. 언제 최고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을 때까지 최고인 나는 볼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고가 아닌 나는 사랑하는 내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응원을 등에 업고서 살아왔다. 최고가 아닌 채로 살아왔다. 최고가 아니어도 살아진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최고가 아닌 내가 최고가 아닌 너를 기대하고 응원하면서. 그렇게 최고의 삶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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