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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rld traveler Nina Jan 03. 2022

바나나를 들고 공원을 누빈 사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슬픈 예감


시작은 이랬다.

"공원에 걸으러 갈래?"

"응, 좋지! 같이 가자."


우리 가족은 운동애호가인 엄마와 나, 운동 비애호가인 아빠와 언니 두 부류로 나뉜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공원 한 바퀴라도 걸어야 한다고 같이 딱 한 바퀴만 같이 산책하러 나가자고

사정사정을 해야 겨우 4명이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엄마와 나는 항상 빠른 포기를 하고 둘이 나간다.

참고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창을 통해서도 호수가 펼쳐진 공원을 볼 수 있고, 길만 건너면 운동을 할 수 있는 천혜의 운동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곳에 살고 있음에 부모님에게 감사한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운동을 권하는 엄마에게 긍정의 신호를 보내고 운동을 갈 채비를 했다.

약간 추울 수 있지만 운동할 때 몸을 잘 잡아주는 레깅스에 종아리를 감싸는 긴 양말을 신고 추울 수 있어서 플리스를 입은 뒤 롱 패딩을 걸쳤다. 이제 든든하다ㅎㅎ


운동하는 중간에 목이 마를 수 있어서 항상 엄마와 나의 수분 보충을 위한 물을 챙긴다. 오늘은 물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유기농 코코넛 워터를 하나 챙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코코넛 워터가 든 오른쪽만 제법 묵직함이 전해져 오지만 운동하면서 마시면 증발될 것이기 때문에 크게 상관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걸어볼 시간이다. 

공원 트랙에 서니 생각보다 제법 산책 또는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많아 북적북적했다.

공원에는 2가지 코스가 존재했는데 하나는 학교 운동장처럼 타원형으로 깔려있는 트랙을 계속 빙빙~ 도는 코스이고 하나는 호수에서 빠져나와 다른 하천과 연결된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걷는 코스이다.


오늘은 호수에서 빠져나와 다른 하천과 연결된 공원 산책로를 걷기로 하고 길을 나섰기 때문에 약속된 코스로 향했다.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경로를 제안을 했다.

지난여름에 같은 코스로 산책을 하다가 같은 길로 돌아오는 것이 지겹다며 다른 코스로 가보자고 했던 터라 어디로 향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단지 하나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돌아오는 길에 공원 산책로에서 빠져나와 새로 생긴 상가들도 구경하고 근처에 위치한 노브랜드 마트도 가는데, 마트만 가면 엄마는 눈이 핑 돌아서 행복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장을 본다는 사실이었다. 평소에도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엄마는 항상 장 볼 것이 별로 없다면서 수레는 하나면 된다고 해놓고서는 최소 수레 2개는 가져와야 하는 장을 보곤 했다. 축적된 데이터로 미루어 보았을 때 오늘도 마트에 들리게 되면 두 손 모두 사용할 정도로 무엇인가를 잔뜩 사 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역시나 축적된 데이터는 무서울 만큼 정확했고, 바나나를 1+1로 판매하는데 무려 2,980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을 뽐내고 있었기 때문에 집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시되어 있는 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줌마 정신을 발휘한 엄마는 기존에 있는 박스를 치워버리고 새로운 박스를 벅벅 뜯기 시작했고, 새로운 박스를 뜯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주변 다른 엄마(?)들이 엄마가 새로운 상자를 뜯고 신선한 상품을 꺼내자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와... 역시 대한민국 아주머니 만세! 우리 엄마 만만세! )


생각해보면 편의점, 마트에서 3,000원~4,000원에 저렴한 가격이라며 한 송이를 판매하고 있는데 두 송이에 그 가격이면 누구라도 집을 수밖에 없긴 했다. 부산 출신인 엄마는 명란 젓갈도 좋아했는데 평소에는 비싸서 잘 사지 못했었다. 신선 식품을 보고 있는데 명란 젓갈도 1+1로 판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개 가격인 5천 원도 안 되는 가격에 2개를 가져갈 수 있다니 안 가져가는 사람이 손해인 것만 같은 기분에 엄마는 홀린 듯이 명란 젓갈도 2개를 집었다. (제발 이제 그만...ㅠㅠ) 다행히 쇼핑은 여기서 멈추었다.


계산을 하고 보니 이제 이 물건들을 들고 다시 집으로 온 거리만큼 돌아가야 하는데 눈앞이 까마득했다.

바나나를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사 가지고 온 터라,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에게 바나나를 들게 할 수는 없으니 결국 이 바나나 2개는 내 차지였고, 엄마는 명란젓갈 2개를 패딩 주머니에 꼬깃꼬깃 잘 넣었다.


바나나를 양쪽 팔에 끼고 앞으로 나아가자니,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엄마랑 한참을 웃었다.

공원 쪽으로 다시 합류해서 걸어가니 나의 양 팔을 향해 힐끔힐끔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저 사람은 뭔데 바나나를 양쪽에 끼고 다녀?'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또 바나나는 왜 이렇게 무거운지. 마치 바나나 모양 아령 두 개를 들고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눈이 한차례 온터라 바닥은 미끄럽고 바람이 불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시리고 해서 엄마가 잠깐잠깐 바나나 하나를 들었다 다시 줬다를 반복했다.


바나나를 들고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갑자기 오늘을 기억하고 싶어져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오늘의 이 기억을 사진과 함께 뭔가 행복한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찍고 뒤로도 찍고 정면으로도 찍었지만 역시 바나나가 잘 보여야 제맛이었다. 오늘의 증거를 위해 사진을 첨부한다.


2022년 1월 2일 바나나 2송이와 함께하는 11,000보의 운동으로 약간은 힘들었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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