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도 높은 여름날, 쓰다 만 나를 끌어안다

기록이 멈춘 자리에서도, 존재는 여전해서—

by 정원



사회에서 정의한 자립 청년이자,
트라우마 생존자인 제가 써 내려가는 일기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친구들이 많지만,
서로에게 온전히 다가서지 못한 채
각자의 고통을 외롭게 견뎌야 하는 날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큰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이 아픔마저
끌어안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더 단단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남깁니다.







1. 낯선 몸으로 깨어난다.



짧은 선잠에서 깨어나는 아침,

나는 또다시 나와 어색해진다.

이따금은 정말 내가 내 몸 안에 있는 게 맞는지,

방금 전까지 누워있던 사람이

과연 나였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마치 누군가의 껍질 속에

잘못 들어온 기분이 들고,

이 몸이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일렁인다.


탐내지 말았어야 할 무엇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부적절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침대의 온도도, 이불의 감촉도,

창밖으로 스며드는 빛조차

내 삶과 연결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나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한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하루의 시작이

내겐 매번 복잡한 재설정이다.

나는 내게로 되돌아오고 싶어 애써보지만,

그 길은 쉽게 잊히고

자꾸만 멀어진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세상에 속한 존재가 맞는지

의문을 품는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대로 흘러가는 아침,

나만 역방향으로 밀려나는 기분.


이 몸에, 이 세상에,

내가 진짜 속할 자리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또 한 번 숨을 고른다.







2. 새벽의 불안이, 다시 아침을 좇아왔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늦었다.

밤은 지나갔지만,

그 속에서 움찔거렸던 불안은

아직도 내 옆에 있었다.


악몽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꿈이라기엔 너무 또렷했고,

현실이라기엔 너무 잔인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온몸을 조이고 있었다.


기억은 흐릿한데,

감각은 명확했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여전히 나를 덮고 있었다.


계단을 밟고

천천히 침대 아래로 내려왔지만—

몸을 옮겼다고 해서

불안까지 떼어낼 순 없었다.


무게는 그대로였고,

내 안의 파도는

단 한 번도 잠잠해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공간,

고요한 아침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쫓기고 있었다.


숨을 고르려 애쓰며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지금 이 하루도

또다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3. 인생이란 무너짐의 연속



건강한 것들을 때려 넣고 비빔밥을 만들었다.

살짝 데친 양배추, 파프리카, 오이, 고추, 참치,

그리고 아보카도까지—

몸에 좋다는 것들을

내 안에 쓸어 넣기라도 하듯

과하다 싶을 만큼 담았다.


그건 마치

무너져가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간장과 화이트발사믹,

참기름과 올리브오일로

간을 더하고,

그 위에 새콤한 기대를 뿌렸지만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건강한 맛’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정말 원한 건

그런 맛이 아니었다.


꾸역꾸역 몇 숟갈을 넘기다가

고추 하나를 씹는 순간,

매운맛이 혀를 덮치고

눈물이 차올랐다.


오이고추였다.

다른 것들은 안 매웠는데,

이 고추 하나만

무언가 돌연변이처럼

나를 찔러버렸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허탈함과 짜증,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건강을 위해 먹은 한 끼가

결국 내 감정을 건드렸다.

나는 그저 잘 살아보려 했을 뿐인데,

오늘도 무너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4. 얼룩진 하루



뒤척이다 겨우 잠든 새벽,

한 시간이 조금 지나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시간 단위로 두 번.

그리고 이어진

모르는 번호의 전화.


그 전화는

얼마 전 자살 시도를 했던 지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그 전화를 받고 또 무거워질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저,

잠시만이라도

내 삶의 파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싶었다.

모른 척하고 싶었다.

죄책감과 걱정 사이에서

나는 또다시 일그러진 아침을 맞아야만 했다.


몸은 피곤했고,

마음은 예민했다.

게다가 오늘은

정규 근무일도 아닌데

알바생의 일정 때문에

결국 출근해야 하는 날이었다.


쉬어야 하는 날에

일터로 나간다는 것,

그 자체로 속이 뒤집혔다.

아무도 몰라주는 억울함이

뱃속에서 부글부글 올라왔다.


그래도 출근은 해야 했기에

밖으로 나왔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는데—


왕복 세 시간을 들여

네 시간짜리 근무를 하러 가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뜨거운 햇살보다 강렬한

내 안의 분노와 억울함이

그렇게 끓고 있었다.






5. 인생은, 셀프



깜빡했던 설정을 뒤늦게 떠올리고

출근길, 방해금지 모드를 해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며칠 전,

지인의 자살 시도 당시 출동했던 경찰이었다.


지인이 퇴원과 동시에

또 다른 시도를 반복했고,

그 소식을 내게 전하며

혹시 그를 돌봐줄 보호자,

혹은 연락 가능한 지인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순간, 꾹꾹 눌러왔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저에게 이런 소식 그만 전하셨으면 해요.

저는 그 사람의 보호자가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저도 일상이 있고,

매일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어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곧장 후회가 몰려왔다.

“근무 중이라 어쩔 수 없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조심스럽게 사과를 덧붙였다.

통화는 차분히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출근길이 아니었다면,

버스 한복판에서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내 울고 싶을 만큼

마음이 힘들었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싫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었다.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무책임과 단절이 아닌,

건강한 거리란 무엇인지.

내 일상을 지키면서도

누군가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방법은

과연 가능한지.


어디까지가 나의 책임이고,

어디부터는 그 사람의 삶인지—

이 경계선 위에 선 나는,

또 하루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0606

쓰다 만 일기.


어디까지가 나였고,

어디부터가 타인이었는지

잘 구분할 수 없는 하루였지만—


그래도 내게는,

쓰다 만 이 기록마저 소중하다.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내가,

쓰다 만 문장을 보일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

작은 위안을 느낀다.


다 쓰지 않아도,

기록이 멈춘 자리에서도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남겨두려 한다.









[ 여름의 위로 ]



저녁 하늘의 빛은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의 애틋함을 품고 있다.

무언가 끝나가는 시간일까,

새로운 쉼이 시작되는 경계일까—

잘은 모르겠다.


그저,

무너진 하루의 끝.

내가 걷던 길 위에도

살포시 저녁이 내려앉았다.


멈춰버린 문장들 속에서도

세상은 오색빛의 찬란함으로

나를 다정히 끌어안고 있었다.


고요히 피어올라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여름의 상징, 장미.


길어진 하루 끝에

여러 이의 마음을 녹여주는

붉고 차분한 노을.


그 채도 높은 여름날의 세상이—

쓰다 만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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