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생존자의 하루 일기
아침부터 약속이 있어 일찍 나왔다.
가을을 알리는 높고 푸른 하늘은 어딜 걸어도 한 폭의 그림 같았고,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새벽 내내 악몽에 시달려 무거웠던 몸과 마음이, 집 밖을 나서는 순간 환하게 차오른 게 신기했다.
10년째 보고 있는 나의 첫 멘토님과 점심을 함께했다. 직장 근처라 곳곳에서 아는 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고, 매번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준비한 작은 복주머니를 드릴 수 있었다. 삼계탕으로 가을의 시작을 든든히 채우고, 커피를 곁들이며 은퇴와 결혼,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잔소리도 곁들여졌지만, 그래서 더 재밌었다.
출근 전 남은 시간에는 센터 근처 산책로를 따라 걷고, 바람도 한참 맞았다. 언제 찾아도 좋은 길이, 오늘은 유난히 내 마음을 새롭게 씻어주는 듯했다.
근무를 시작하기 전, 하나의 뉴스를 보았다.
사적 제재에 관한 기사였다. 10대 때 겪은 일을 고발했지만, 법정에서 가해자는 벌금형에 그쳤다. 결국 피해자는 20대가 되어 가해자를 찾아가 칼로 찔렀고, 이제는 가해자가 되어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를 읽으며 피해자에게 감정이입되어 울컥했다. 5-4-3-2-1 그라운딩 기법을 해보았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보이는 것 5가지, 만질 수 있는 것 4가지, 들을 수 있는 것 3가지,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2가지, 맛볼 수 있는 것 1가지… 마지막 하나, 멘톨향 캔디를 물고 나서야 불안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내게도 현재 진행 중인 이 사건이 끝나가는 어느 날, 나는 정말로 법의 결과 앞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피해 정도를 구분하는 일이 이해되면서도, 동시에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 일인지 속상한 마음이 가득 차올라, 기사를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본 이상, 그 속상함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긴 오전이 지나가고서야 근무를 시작했다.
오늘은 건물 전체의 소방 훈련이 있어 자리를 비운 선생님들이 많았다. 마침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의 생일이라, 훈련 후 매니저님이 사 온 케이크로 짧은 축하 파티를 했다. 수업과 수업 사이 단 10분 동안 옹기종기 모여 케이크를 자르는 순간이 뭉클했다. 1년 가까이 하루 종일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정 하나는 끈끈히 쌓여 있었다.
정말 맛있는 케이크라 했지만, 한입 맛보면 더 먹고 싶어질까 봐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원하는 목표 체중에 도달하면, 그때 꼭 먹어야지 다짐했다.
근무는 수월했고, 크게 신경 쓸 일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바지 입고 올걸, 운동복 챙겨 올걸’ 하는 아쉬움이 스쳤다.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으니까. 매니저님이 센터 운동복을 입고 뛰러 나가자고 권했지만, 사양하고 대신 자리에 앉아 운동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요즘은 인체 역학과 운동과학이 특히 흥미롭다. 하루에 하나씩 정리해 두던 운동 정보 스크랩을 조금 더 확장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것이 나만의 소중한 자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깊지만 휘몰아치지 않고, 잔잔히 오래도록 함께하는 불안. 오늘은 사건과 관련한 전화 통화도 있었고, 복통으로 인한 불안도 깊어 퇴근 후 상담을 받기로 했다. 불안이 잔잔하다면, 나 역시 같은 템포로 잔잔히 껴안아주어야지. 그렇게 불안의 한가운데 서서, 또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