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내느라 쓰지 못한 자의 변명

by 정원



무너져도 루틴대로 살아내는 요즘이다.

밤새 울어도 다시 몸을 일으켜 운동복을 챙겨 입고, 지친 몸을 이끌고도 배달 어플 대신 영양가 있는 도시락을 직접 챙긴다. 그 반복되는 습관 속에서 나는 간신히 버틴다.


운동은 그중에서도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준다.

최근에는 잘하는 동작보다 못하는 동작을 찾아내고 보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처음엔 ‘운동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이걸 못하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자세를 고치고 작은 균형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묘한 즐거움이 피어났다.


예를 들어, 스쿼트에서 무너지는 내 몸을 보면서도 차근차근 교정하니 조금씩 안정되는 느낌이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잘하는 것만 반복해선 절대 알 수 없는 배움이 있다는 것.


새로운 동작을 받아들이는 시각이 달라지자, 운동 자체가 다르게 다가왔다. 성취만이 목적이 아니라, 부족함을 채우는 과정이 곧 즐거움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몸의 균형을 찾아가는 시간이 결국 마음의 균형까지 다잡아주는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또 하나의 배움은, 비움 속에서 채워지는 경험이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무엇이든 잘하지 못하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잘하지 못하는 나는, 그 행위를 안 하느니만 못한 모자란 존재처럼 여겨졌다. “시간 낭비나 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매일 되뇌었다. 그 시간이 이어지자, 살아 있음조차 쓸모없게 느껴졌다. 나아지지 못할 거라 단정했고, 그런 존재는 세상에서 없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타인이나 길고양이, 파란 하늘과 길가의 꽃을 보며 예쁘다고 먼저 말하던 내가, 왜 유독 나 자신에게만은 그런 말을 건네지 못했을까. 지금도 그건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잘하지 못해도 시작할 수 있고, 꾸준히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거창한 성취가 없어도 괜찮고, 멀리 있는 미래를 꿈꾸지 않아도 괜찮다. 마음을 내려놓을수록 사소한 것들이 대단해 보였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더 크게 와닿았다.


죽고 싶다 말하면서도 루틴을 성실히 이어온 나는, 모르는 새에 꽤나 성장해 있었다.

사건 진행을 이어가기로 결심한 그날, 마음 한켠이 어딘가에 단단히 붙잡힌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서울 길바닥에서 더는 혼자 울지 않았고, 퇴근길 갑작스런 폭우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여느 날처럼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마음이 깊이 가라앉는 날에는 죽음을 그리기 전에 상담쌤을 찾았고, 성실을 인정받아 진급과 성과급도 받았다. 예전 같으면 진작에 삶을 놓아버렸을 순간들 앞에서도 덤덤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건, 나에게 큰 변화이자 발전이다.


여전히 두렵다. 많은 기억과 사람들, 깊은 삶의 굴곡들이 나를 여전히 흔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두려워서 멈추는 순간,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켜 세상에서 지워버릴 거라는 걸. 그렇기에 두려움에도 나아가는 오늘이 나를 살게 할 것이다.


회복의 서사는

언제나 고통을 전제한다는 걸 아는 나는,

오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택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이 글을 써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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