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코 Dec 14. 2022

2022 1월, 펜싱 (Fencing)

한 달, 한 개의 도전 

어느 소년만화처럼 운명적으로 이 운동에 끌린 건 아니다. 막 이 스포츠가 어쩔 수 없을 만큼 너무 매력적으로 보여서라거나 아니면 어떤 멋진 선수의 경기에 순간 반하는 드라마틱한 일은 없었다. 펜싱을 선택하게 된 건 단순히 내 도전 기준 원칙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3가지 도전 기준 원칙]

원칙 1. 단순히 호기심이 조금이라도 가는 것,

원칙 2. 내 인생에 이렇게라도 갑자기 도전하지 않으면 영영 접해보지 못할 것 같은 것,

원칙 3. 그냥 멋져 보이는 것.


펜싱은 2번과 3번에 해당되었다. 그럼에도 체력적으로 매주 2회 이상, 혹은 두 시간 이상 진행하는 건 무리라 생각돼서 애초부터 주 1회 정도만 생각하고 시작했다. 거기다 뭐든 쉽게 질리는 성격이라. 나는 이 펜싱이란 친구에 대해서 얇지만 되도록 넓게, 천천히 알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펜싱이 뭔데요.

펜싱이란 스포츠가 나에게 그나마 친숙하게 된 건 올림픽 덕분이다. 근데 그 유명하다던 올림픽 경기를 시청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그저 거기서 스쳐 지나가듯 본 이미지, 짧은 영상들이 전부다. 그 덕분에 펜싱에 대해 대략적인 이미지는 공통적으로 있다. 그 가면 쓰고 전신 흰색 옷에 칼 들고 촵촵 싸우는 그 운동? 그래, 그 가면 쓰고 전신 흰색 옷에 칼 들고 촵촵 싸우는 운동. 알지 알지. 그러면서 쥐뿔도 모르는 게 펜싱클럽 문을 용감하게 두드렸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나름의 규칙이 있다. 그래서 우선 경기를 위해선 기본적인 연습과 스포츠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쌩 초보가 대뜸 축구 경기를 뛸 수 없듯 펜싱도 그랬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지금까지도 경기 규칙을 정확히 잘 모르겠다. 고백하건대 작년에 한번 원 데이 클래스로 한번 경험해 보고 올해 1월부터 클래스를 수강하게 된 터라 진짜배기 초보이다. 주 1회 수강생인 초보에게 무얼 바라겠는가. 4월이 된 지금까지도 경기 룰을 정확히 알진 못한다. 직장인이 이 정도면 장하지 뭐. (사회는 대단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영혼까지 끌어모아 칭찬하는 사람으로 만들다니.)


내가 아는 룰은 지금 적는 몇 줄이 전부이다. 상대 칼을 치면 공격권이 주어지는 것,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내 칼을 치면 공격권이 빼앗긴다는 것, 찌르는 칼을 정확히 눌러야 점수에 측정이 된다는 것, 특유의 기본자세와 공격별로 다른 자세들이 있다는 것 등등. 앞서 말했지만 이미지로만 펜싱을 알고 있었지 나는 올림픽 경기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다른 스포츠와 차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거였다. 인사. 펜싱은 제 나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사 동작이 있다. '살루트(salut)'이라는 프랑스 인사로 칼을 제 코앞까지 올려 마주한다. 동방예의지국 출신이라 자꾸 그 칼 앞 너머의 상대방에게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점은 어쩔 수 없다만 그래도 동작 자체에, 뭔가 서양 예절(혹은 귀족 허세)이 가득 담긴 인사를 하고 있노라면 이게 묘하게 나 자신이 멋있는 거라. 나는 그 인사 동작이 마음에 든다.


이상과 현실

우선 수업은 기본 스트레칭 + 기본 달리기 및 동작별 달리기 + 그날그날 선생님 재량에 따른 다른 펜싱 수업 + 마무리 스트레칭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 미련한 머리를 가진 둔한 몸은 첫날 하면서 깨달았다. 이거.. 스쿼트 자세인데..? 주인님아. 이거 스쿼트 자세 같아요.(다급)... 지금 스쿼트 자세로 계속 있는다고요!!


그랬지.. 펜싱은 스쿼트(같은) 자세가 기본 동작이었던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세계 펜싱 선수권 대회

물론 1시간 내내 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니다. 선생님은 초보 학생들에게 자비로웠다. 길어야 2분 되는 자세를 취하며 생각했다. 우선 운동이 안될 거란 착각은 오해였군. 다행이야.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애써 태연한 척 생각했다. 하필 시국도 시국인지라 마스크 쓰면서 하고 있자니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래 죽지만 않으면 됐지 뭐. (어딘가 몸이 인터스텔라 차원을 넘어 애타게 책장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펜싱은 이렇게 기본 동작부터 시작해서 여러 동작이 있다. 거기다 각 동작마다 명칭이 붙어있다. 마르쉐, 롱뻬, 팡뜨 등등.. 그렇다. 프랑스어가 붙어있다. 그래.. 지금 독일어 공부를 할 게 아니라 프랑스어 공부를 해야 했었어. (취미로 독일어 공부 중) 하지만 독일어 수준도 너무 초보라 프랑스어를 병행할 수 없는 관계로 나는 다음을 기약했다. 우선 이 이름과 동작 매칭부터 바로바로 되기 어려웠다. 반복 연습, 반복 연습만이 몸에 자동적으로 익을 거라는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나는 묵묵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내 눈앞에 선생님은 다시 알려주실 때마다 답답해할 노릇이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저는 분명 노력했지만 제 몸이 말을 안 듣는 겁니다. 제 몸은 정말 왜 이러는 걸까요.



내가 생각했던 펜싱 VS 실제 거울 속 내 몸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이상적으로 그리는 펜싱과 거울 속에 비친 내가 하고 있는 펜싱의 갭이란 꽤나 큰 편이다. 우선 몸이 안 따라 주는 걸. 나는 분명 따라 한다고 동작을 해도 어느새 힘든 내 무릎은 조금 펴져있고 허리는 불쌍하게 조금 더 굽었으며 칼끝은 다시 이상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마치 무슨 나에게만 내려진 자연법칙 같다. 허벅지가 아파지고 숨이 찰 때마다 속으로 되뇐다. 신이시여 이 가련한 중생을 돌보시옵고... 부디 이 체레기(체력+쓰레기) 몸을 굽어살펴주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고...


펜싱의 어려움

내가 다니던 펜싱장

펜싱은 길이 길게 나있다. 농구에 농구 코트가 있고 그 끝에 농구 골대가 있듯이 펜싱장도 세로로 길게 경기장이 나 있으며 선수가 종(縱)으로 움직이는 운동이다. 그리고 길이 길게 난 끝에 전신 거울이 붙어있다. 어떤 운동들은 가끔 이렇게 전신 거울이 있었다. 앞으로 이야기할 발레나 댄스가 그랬고, 펜싱도 그중에 하나였다. 내가 모든 펜싱장을 다녀본 건 아니지만 그거 하난 확실했다. 펜싱이 다른 일반 스포츠와 다른 점은 자세를 꽤나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들 같은 경우 결국 공 중점으로 운동하지만, 펜싱은 칼과 칼을 쥔 자세, 거기에 연결된 팔의 각도와 다리 자세까지 정해져 있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실점으로도 이어진다. 이런 자세가 생각보다 어렵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세 자체보다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 익숙지 않은 동작을 계속 취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풀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벽면에 거울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울을 보고 너 자신을 깨달아라는 가르침인가...


그런데 가끔 자세를 배우면서 머리에 스쳐 지나가듯 떠오르는 생각은 멈출 수 없었다. 귀족 놈들, 자세 한번 요란하게 만들었구먼.                       


그렇게 자세를 유지하는 것까지도 문젠데 이 종으로 움직이는 방향 맞은편엔 필연적으로 상대방이 있다. 이 스포츠의 시작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비롯되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공격적인 운동임을 경험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완전한 1:1이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허점을 찔러서 빠른 속도로 공격과 방어를 해내는 것. 겨우 주 1회 3개월 넘어 기본기에 허덕이고 있는 나는 아직 제대로 경기를 경험해 보진 못했다. 그리고 아직 경기보단 배우는 쪽이 마음이 더 편하고.


우선 칼로 찌르는 동작은 생각보다 어렵다. 자세 자체의 어려움보다 내 몸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자세를 피하려는 느낌이다. 선생님도 내 자세에 찌르는 부분을 많이 지적하신다. 근데 내 몸이 싸움을 저절로 피하는걸요.(INFP: 열정적인 중재자) 지금 생각해도 누군가와 '싸운다는 게' 어렵기만 하다. 싸운다는 게 나쁘다는 교육을 받아와서 그런가. 여자는 조신하고 얌전해야 한다는 그 옛날 사회적 분위기 속에 자라서 그런가. 저도 모르게 계속 드는 거부감과 맞서 싸우고 있다. 하지만 펜싱뿐만 아니라 인생에 때때로 싸움이 필요한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걸 회피해온 것도.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내 안의 공격성을 살려본다. 어깨를 치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거기에 맞아줄 필요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4월인 지금도 나는 예의 있고 우아하게 잘 싸우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 우아하게 싸우는 방법이 있긴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운동이 부디 나에게 삶에서 필요한 공격성을 가르쳐주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한 달 한 개의 도전을 시작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