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한 개의 도전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다. 음악 자체라기보단 '듣는 것'이 주는 타 세계로의 여행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어울리게 듣는 것만으로 그 세계에 더욱 맞춰서 집중하거나 도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상황과 분위기에 맞춰 무언갈 듣는 편인데, 출근길에는 멍한 정신을 돌아가게끔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팟캐스트를, 업무 중에 들을 수 있을 땐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신나는 노동요 팝송을, 퇴근길에는 마음을 비우게 아무 생각 없이 랜덤 재생을, 운동 중엔 다른 상상을 하기에 어울리는 가사 없는 웅장하고 비트 있는 OST를, 그리고 마음의 수양이 필요할 땐 클래식을 듣는다.
클래식은 가사가 없는대서 오는 음률 자체만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성악은 잠깐 눈을 감자.) 시대별 형식과 추구하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귀에 닿는 그 '아름다움'의 가치 추구는 그 멋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나온 나이대별로 선호하는 클래식 작곡가 좀 있는데, 질풍 노토의 청소년기 땐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했고, 스트레스와 자유가 뒤범벅한 대학생 때는 쇼팽이 귀에 꽂혔으며, 최근엔 바흐를 편안하게 좋아한다. 그렇다고 이전에 선호했던 작곡가들의 음악을 질색하는 건 아니고, 마음에 다가오는 울림이 시절 별로 다르게 오는 예술이 있는 것 같다. 청소년기 때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이 추천 도서인 것처럼.
어렸을 때 클래식을 자주 접한 편이기는 했다. 엄마가 성악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자식들에게 클래식 연주하는 기쁨을 가르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많은 내 또래들처럼 피아노도 배웠지만 나는 더해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동생은 첼로였다. 엄마는 가족 3중주 연주단을 차리고 싶었을까.) 어렸을 때 배우고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 것처럼 바이올린 또한 배우고 잊어버린, 시간에 흩어진 물건 같았다. 그건 마치 책장 한쪽에 먼지와 함께 쌓인 엄마의 오래된 클래식 LP와 동일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고, 그 시절을 박제해버린 물건 정도만의 기능을 가진 것.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의 바흐-샤콘(Chaconne from Partita No 2 in d minor)을 듣고 말았다. 그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 감명 깊고 울림 있는 연주에 내가 다 떨릴 정도였다. 성당 건축물에서 음향기기 도움 없이 건물 울림만으로 독주하는 연주는 거칠고 압도적이었다. 마치 다섯 개의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것 같다는 이 곡은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의 강렬하고 힘 있는 연주로 구현되었는데, 독실한 종교인이라던 바흐의 특징처럼 마치 세상의 희극과 비극을 어우르는 찬양가 같다. 유튜브는 밉다가도 종종 이런 연주를 무상으로 제공해서 미워하기 어렵다. 나는 무료로 이런 연주를 이렇게 들어도 되는지에 대한 생각과, 실제 오프라인으로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러움과 아쉬움을 그렸다. 그렇게 나는 주변 사람 이름을 외우는 것에 무척 젬병인 주제에 이 연주를 통해 정경화 석자를 정확히 기억했다.
이렇게 정경화 님 연주를 여러 번 들으니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츠하크 펄먼의 바흐-Partita 연주를 추천해 줬다. 다 듣고 나니 사라 장의 비탈리- 샤콘(Vitali-Chaconne) 도 추천해 줬다. 괘씸한 유튜브 놈. 계속 좋은 것만 추천해 줘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바이올린 연주에 새삼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듣다 보니 바이올린 연주에 새삼 빠졌다.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할 때 각자의 방식으로 좋아하게 되는데, 나는 괴롭게도(?)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좋아한다. 그냥 바라보고 응원하는 것으로 좋아함을 끝내면 얼마나 좋을까. 굳이 고생, 비용, 시간이라는 삼박자를 써가며 딱히 결과물이 전문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직접 체험을 하고 싶은 욕구가 여지없이 생기는 것이다. 디저트를 좋아해서 독학으로 베이킹을 시작하게 된 것처럼, 바이올린을 듣다 보니 좋아서 직접 연주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꿈틀거리는 마음으로 작년에 바이올린을 인터넷으로 주문해두긴 했다. 기억력이 없기로 유명한 나에게 놀랍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어렸을 때의 이야기 중 하나인데, 어느 축하 자리에서 연주해 본 기억도 있는 나름 바이올린 경험자인 것이다. 언젠가 다시고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은 경험 때문인지 쉽게 찾아왔다. 물론 지금은 아무것도 연주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이번 달은 바이올린을 도전과제로 삼았다. 벼르고 벼르던 배움의 시간이다.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건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 별'이다. 이 곡을 연주하니 9살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연주 실력도 9살 때로 돌아가 있었다. 선생님은 용케 내 실력을 비웃지 않으시고 침착하게 가르치셨다. (경험자라고 말은 했지만 크게 기대하시면 안 된다고 미리 밑밥을 깔아 두긴 했다.) 듣는 귀는 높아져 있는데 손은 그렇게 따라주지 않으니 영 괴로웠다.
그래도 처음 몇 주는 연습 자체가 즐거웠다. 손에서 직접 소리를 낸다는 재미는 오랜만이었다. 어렸을 때는 연습하라는 압박이 그렇게 싫었는데, 다 크고 내 돈으로 배우자니 연습이 너무 하고 싶었다. 가끔은 회사에서도 연습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심지어 왼손 현을 누르는 손가락들이 물집 잡혀도 '내가 물집이 잡힐 만큼 연습하고 있구나'라는 뿌듯함이 컸다.
다섯 개의 현만으로 집중되는 음률을 연주하는 건 피아노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피아노는 검은건반 36개, 흰건반 52개로 열 손가락으로 다층적이고 풍부한 소리를 내지만, 현악기들은 단 하나의 포커싱 된 음률을 노래한다. 굉장히 집중적이고 뚜렷한 선율이다. 그래서 그만큼 와닿은 감정도 뚜렷하고 연주자의 테크닉이 선명하다. 손가락으로 정확한 음정을 줄 사이에서 감각으로만 집어야 하며, 활을 누르는 세기, 각도가 명확해야 한다. 이렇게 줄줄이 적는 이유는 내가 그런 부분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뭐다? 연습이다. 모든 음악예술은 연습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한 달은 바이올린 하는 것 자체를 즐거워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연습해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실력은 짜증을 더해갔다. 가끔은 내 악기가 너무 싸구려라 좋지 않은 소리가 나는 건가 애꿎은 원망을 할 때도 있다.(물론 그렇게 심한 싸구려를 구매한 건 아니었다.) 이런 게 좋아하는 느낌일까. 처음엔 좋아함뿐이지만 나중엔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 우울해지다, 누구 탓을 하며 짜증을 내다가, 그래도 버릴 수 없어 다시 붙잡고 있는 것. 좋아함의 깊이를 쌓는다는 건 항상 모든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법임을 배우고 있다.
6월 말이 된 지금 스즈키 3권에 들어와 있고 다른 부가적 책들도 추가돼 총 4권의 연습/연주 책들이 있다. 음계에 따라 정확히 연습하는 일은 어찌 보면 지루할 수 있고, 찡찡 찢어지는 소리들은 같이 사는 가족들을 짜증 나게 할 수도 있다. 더불어 사는 사회인만큼 일정 시간 넘어서는 연주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 연습할 땐 되도록 집안 모든 창문을 닫은 상태에서 벽과 멀어진 위치에서 연습한다.(옆집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꿈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내 수많은 꿈들 중 하나로 바이올린 연주를 잘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지금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과 활이 원망스럽지만 언젠가 이 시간들이 지나면 나에게 다가와 줄 거라고 믿고 있다. 바이올린 브리지 아래에 쌓인 흰 송진가루가 가끔 뿌듯하다고 혼자 생각하면서. 엄마의 아무도 듣지 않던 오래된 LP들이 내 것이 된 것처럼. 그래도 목표가 있어야 이 끝없어 보이는 길에 방점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원대한 목표도 하나 삼았다. 내 바이올린 재시작점이 되어준 바흐 샤콘 곡을 '잘' 연주해 보기.
마치 얼굴을 마주 보는 것 같은 바이올린이란 악기를 마주 보면서 인사한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추천 연주
- 정경화 - 바흐, 샤콘 from Partita No 2 in d minor
- 이자크 펄먼 - 바흐, Partita in D Minor
- 사라 장 - 비탈리, 샤콘느 in G Minor
- 비발디, 겨울 (비발디 작곡가 시대 오리지널 스타일의 악기들로 구성된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