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3학년 대표로 홀로 야구부에 들어가 감독님과 선배들에게 인사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짜리가 겁도 없이 이 세계를 들어오다니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당차고 겁이 없었던 내가 산처럼 큰 선배들 앞에 있으니 잔뜩 얼어있었다.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도 모르게 감독님은 나에게 "오늘은 처음 왔으니까 어떻게 훈련 하는지 보기만 하라"고 이야기했다. 추운 겨울에 고구마를 구워먹을 수 있는 정도에 따뜻한 난로 앞에 앉아 선배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보았다.
선배들은 마치 자신이 프로야구선수가 된 듯 나를 의식하며 야구를 잘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원래 남자들은 군대에서나 운동세계에서나 후배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나름 각을 잡고 멋있는 척을 할 때가 많다(나도 고학년이 되어서 그랬다. 어쩔 수 없더라). 나는 TV에서 보던 야구공을 실제로 만져보고 눈으로 훈련하는 장면을 바로 앞에서 경험해보니 빨리 함께 어울리며 그라운드를 뛰고 싶었다. 거의 연습이 끝나갈 무렵 다 같이 런닝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데 감독님도 "춘호야 너도 같이 뛰고 들어와라"라며 권면하셨다. 그렇게 학교를 대표하는 운동부라는 정체성으로 선배들과 소리를 지르며 운동장을 뛰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속감이라는 것을 이 때 말고 크게 누려본 적이 없을 만큼 이 기억이 생생하다.
날씨가 영하로 내려간 추운 운동장에서 큰 기합소리와 함께 모두가 땀을 흘리며 고작 운동장을 뛴 것인데 야구의 매력을 다 안 것 같은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정해진 횟수만큼 운동장을 뛰고 마지막은 넓게 동그랗게 퍼져서 스트레칭을 하며 운동을 마무리한다. 그 때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나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당시 이준호로 기억이 난다) 4학년 선배가 "춘호 너는 아직 3학년이니 내 생각에는 우익수로 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익수가 어디지?
포지션에 대해 그저 투수와 타자 밖에 모르는 나에게 생소한 우익수(영어로는 right fielder)는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곳, 우익수는 외야수 중에 가장 송구 능력이 뛰어나야 하며 타구의 질이 다른 외야 포지션보다 변화가 심해서 수비를 잘하는 사람들이 서게 되는 포지션이다. 그런데 아마야구는 우익수라는 포지션은 제일 실력이 없는, 마치 어느 외딴 섬에 유배가 되는 것처럼 저 멀리 맨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포지션으로 생각하곤 했다. 지금은 야구가 너무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아마야구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그 선배의 예언대로 우익수로 가게 되었다(혹시 감독님 아들인가?).
운동부는 마무리 운동을 하고 감독님에게 코치님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헤어진다. 학교가 떠나갈 정도로 우렁한 인사로 "수고하셨습니다!"를 크게 외쳤다. 이 때 부터 나는 야구부 학생들이 왜 학교에서 그렇게 당당한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집으로 흩어질 때 집이 같은 방향이면 너도 나도 상관 없이 선배든 후배든 같이 집으로 가는 의리있는 모습이 있다. 운동이 끝나면 배가 고픈 시간인지라 야구부에서 주는 간식으로는 성이 안찬다. 그래서 집으로 바로 안가고 학교 앞에 있는 떡볶이 집에 가서 500원어치를 시키면 한 봉지를 주는데 입으로 봉지 앞면을 살짝 뜯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떡들을 쪽쪽 빨아먹으면 그렇게 꿀맛이다. 어쩌면 운동이 끝나고 야구로 성공한다는 마음 보다는 훈련 끝나고 먹는 간식시간이 어린 초등학생 야구선수들이 제일 기다리고 애타게 바라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는 순수했고 시끌벅적한 어린이였다.
나는 학교와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아까 선배가 말했던 우익수를 홈플레이트를 기점으로 정해진 그 자리에 가서 서 보았다. 실제로 경기하는 것처럼 상상을 하면서 어떻게 공이 날아올지 예상도 해보고 내가 여기 서면 사람들에게 잘 보일 수 있을지도 가늠해보았다. (스타성을 놓고 싶지 않았기에)
아 내 방 같다.
실제로 아직 3학년 야구의 야짜도 모르는 풋내기가 여기에 있는 게 합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역시 그 때와 그 시기에 알맞는 자신의 자리가 있다. 나는 어린 그 때부터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사이에 가장 멀리 실력이 없는 후보들이 제일 먼저 찾는 그 자리 '우익수'. 나는 이 자리가 참 편했다. 앞으로 여기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른채 그저 내 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 이 자리에서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