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깔라만시를 원액으로 마셔본 적 있나요? 저는 깔라만시를 원액으로 마신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깔라만시가 몸에 좋다고 해서 부모님 집으로 배송시켰다. 이 원액은 물에 타 먹기 좋게 돌리는 뚜껑이 한쪽 모서리에 달려 있는 형태였는데 아버지는 오자마자 거대한 음료수인 듯 그걸 한 모금 바로 시원하게 삼키셨다. 옆에서 폰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던 엄마가 그 순간을 포착해 사진으로 찍었다. 이 세상 모든 광고 속 상큼한 표정을 짓는 모든 연예인을 능가할 정도로 신 맛을 가장 잘 표현한 얼굴이었다. 깔라만시 원액을 통째로 들이마시면 위에 구멍이 날 수도 있다. 이 원액은 아주 소량 덜어서 물이나 탄산수를 가득 부어 저어 먹어야 한다.
철학수업시간에 보는 대학교재는 대략 이런 식으로 적혀있다. 이 교재들이 과연 깔라만시 원액처럼 첫 학기에는 감당이 잘 안됐다.
[도의 논쟁자들] 383쪽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인도로부터 불교가 도래하기 이전의 중국 철학에 대한 일반화는 중국 철학이 형이상학적 체계 구축의 충동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 철학에도 형이상학적 쟁점이 출현하며, 그중의 하나인 하늘과 인간의 분리를 우리는 그 발전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통 우주관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맹자나 장자 같은 사상가들은 뒤로 물러서서 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체계로 갖춘 전체로 구성하려는 경향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정명도와 정이천의 철학] 22쪽
신유학자들의 위대한 성취는 이러한 이전의 모든 개념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든 구체적 사물들을 기의 응축을 통한 변용들로서 간주했다. 그리고 ‘도’,‘천’,‘성’을 사물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단일한 리의 서로 다른 측면들로서 간주했다. 송대에 정점에 이른 유학의 부흥은 일반적으로 바로 이전 시대인 당대의 한유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송 초에 이르는 이후 2세기 반 동안 이 부흥 운동은 불교와 도교에 대항해 유가 경전에 체현된 가치들을 옹호하는 데 국한된다.
어.렵.다.
큰 단어들이 한 마디 걸러 한 마디마다 출현하기 때문에 어렵다. 처음 철학과 수업을 들었을 때, 진짜 이건 사람들이 보라고 쓴 건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통하는 언어로 자기들끼리만 보려고 쓴 건지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당신이 우리의 세계에 들어오고 싶으면 우리가 쓰는 언어를 배워라 하는 것 같았다. 한글로 적혀 있는데도 도통 무슨 말인지 한 문장에서 막히고 다음 문장에서 또 막힌다.
나의 첫 에세이 [나를 없애버리고 싶을 때]를 쓸 때의 일이다. 인간은 흐리멍덩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뇌과학자의 이론과 인간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모두 허상이라는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중생스러운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 또한 이런 철학적 사상의 뒷받침이었다.
‘사람들 간에는 합의된 진리는 없으며, 단지 각자의 진실만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까 나만의 진실쯤 세상에 실어 보내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
모두 다 내 체험이나 사적인 생각을 담아낸 책이지만 철학적인 이론도 한 번은 소개하고 싶어서 [교수들]이라는 제목을 단 글을 썼다. 무심한 듯 툭 많은 글의 어디쯤 중간에 집어넣고, 그동안 제가 제 생각으로만 쓰신 줄 아실 수도 있는데 사실은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하고 강조하고 싶었다. 철학과 대학교재에서 당황해 봤기에 나는 최대한 철학적 이론을 정말 쉽게, 또 쉽게 벗겨내서 할 수 있는 한 쉽게 쓰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는 내가 쓴 글을 읽고 어렵다고 했다. 나는 마치 내 외모를 지적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학 전공서적 읽는 기분이에요 라니. 나는 정말 쉽게 쓴 건데. 제삼자에게 내 글을 보여주고 이상한 부분에 대해서 피드백을 받는 일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때라서 피드백해준 수고로움에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내 글이 별로라는 부정적인 자기 의심부터 먼저 왔다.
내가 출판 기획서에 써 놓은 홍보용 문구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정말 그들만의 리그로 느껴질 때가 많다. 결국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나면 왜 이렇게 어렵게 썼지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독성이 좋은 글을 쓰려고 했다.”
출판 기획서에 이렇게 썼는데, 이거는 사실이 아니지 않나요. 작가만의 리그로 느껴지는데요.
한숨에 읽기 좋은 글을 썼다고 나 혼자 막 떠들어대고 또 나 스스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나? 내가 한없이 작아지려고 하는 순간, 상대에 대한 비난이라는 카드를 꺼내어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나는 참으로 중생스럽지 않은가.
이 친구는 철학에 대해서는 좀 이해력이 떨어지나 봐 같은 건방진 생각이 휙 스쳐 지나갔다. 전공분야도 아니고, 생활 속에서 철학을 가까이 두지 않고 사유하지 않으면 낯설 수도 있지. 그래서 나는 [도의 논쟁자들]이나 [정명도와 정이천의 철학] 어디쯤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며, 이게 어렵지라고 답장을 보냈다.
아, 그러네요. 이건 정말 어려워요 라고 답이 돌아왔다. 시간을 내서 내 글을 읽어주고, 독자의 눈으로 가감 없이 발전적인 평가를 해준 고마운 친구에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며 누군가 내 속에서 나를 다그쳤다. 처음 철학 전공서적을 읽으면서, 이거를 자기들끼리 보려고 쓴 거야 아니면 정말 이런 단어들로밖에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이러는 건지 어쩐지 짜증이 났던 나를 떠올렸다. 결국 친구의 솔직한 평가에 화가 난 게 아니라, 내가 쓴 글에 대한 자신감이나 확신이 사라지고, 내가 쓴 글은 나이며, 나의 생각이 부정당한 것 같은, 나의 어수룩함이 탄로 난 것 같은 나쁜 감정이 올라와서였다.
[교수들]
첫 번째 버전 (무심하게 다른 에세이들 사이에 툭 놓아둔 것처럼, 책에서 다루는 내 생각에 대한 설득력을 끌어올리려는 시도였다. 인정받은 전문가의 글을 인용해서, 내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들, 자기 의심, 부정적인 본성은 인간의 타고난 한계이자 본성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너무 불친절하다고들 했다. 저는 철학이나 심리를 잘 몰라서 너무 어렵네요. 내 책은 심리나 철학 이론을 소개하는 책도, 더군다나 가르치려는 책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책을 쓰면서 핵심 철학으로 삼았던 내용들이라서 꼭 가지고 가고 싶었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는 말한다. “당신이 특정 순간에 의식하는 견해는 거품이 생기듯 불현듯 일어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그 순간에 다른 견해들을 이기고 지배력을 쥔 견해이다. 당신의 머릿속은 서로 다른 시스템들이 당신의 의식적 인식이라는 상을 놓고 의식 표면에 떠오르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게 하는 세계이다.”
스티븐 스핑커 교수는 말한다. “우리의 영혼 저 깊은 곳에 진짜 나란 것은 없으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그 자아조차도 일종의 시스템이다. 우리 마음에서 바로 전과는 다른 모듈이 주도권을 쥐게 만드는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느낌’이다.”
도마베치 히데토 교수는 말한다. “뇌는 일처리를 똑바로 하지 않는다. 그건 정보처리 능력이 달려서 이다. 과거에 본 것을 이후에도 매 순간 다시 마주칠 때마다 새롭게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뇌는 교묘하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일처리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사실 친구나 가족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보고 있지 않다. 거기다 확실하게 봤다고 자기를 속인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는 과거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뇌는 우리가 ‘오늘도 이것과 저것을 분명히 봤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게다가 뇌는 저장된 정보를 꺼내 쓰는 일 조차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보지 않고 있으면서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일만 하고 있다. 뇌의 게으름에 속아 어쩌면 당신은 과거의 자신의 이미지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잘못된 이미지를 모두 걷어버리고 눈앞의 자신을 다시 한번 바라보자. 전혀 다른 누군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로버트 라이트 교수는 말한다. “내가 연구하는 진화심리학은 어떻게 뇌가 인생을 통제하고 뇌의 노예로 만드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전자를 잘 퍼뜨리는 인간은 부정확한 정신세계를 가져야 한다. 인간은 부정확하게 지금을 인식하고,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 뇌는 끊임없이 종의 번식을 위해서 인간에게 세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는, 목적을 달성했을 때 쾌락을 느껴야 할 것. 둘째는, 다시 그 행위를 하도록, 쾌락은 일시적일 것. 셋째는, 쾌락이 곧 사라진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오로지 그 쾌락을 다시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나게 할 것.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말한다. “인간은 하루 중 46%를 딴생각을 하는데 쓴다.” 양현진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바닷물의 본성이 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고등어에게 바닷물이 짤까? 분명히 짜지 않을 거다. 인간이 마음대로 바닷물을 짠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때문이다. ‘바닷물 안에 염화나트륨이 있기 때문에’라는 대답은 완결된 답이 아니다. 내가 고등어와 다르게 염화나트륨을 짜다고 느끼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닷물의 본성이 짜서 우리가 짜다고 느끼는 게 아니다.”
2. 두 번째 버전 (그래서 이 교수들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고, 내 생각은 무엇인지 설명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무심하게 다른 에세이들 사이에 툭 던져놓은 듯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제는 교수의 이론을 설명하고, 나의 사례에 적용해서 생각해보는 리포트 형식이 되어버렸다. 마이클 가자니가라는 어려운 이름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는 지인의 말에, 이런 오글거리는 설명도 부쳤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말한다. (나는 철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떤 전문가들의 생각을 많이 접한다. 이 사람이 뭘 말하는 건지 알아보기도 전에 이미 내 마음은 ‘아, 이름부터 어렵다 어려워’ 하면서 슬금슬금 문을 닫는다. 그러면 ‘마이클 가자미씨가 말한다.’로 속으로 고쳐 읽으면 조금 마음이 편안해진다. 친근하게 생긴 물고기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자미가 말했든 가자니가가 말했든 내용은 똑같으니깐) 지금 보니까 많이 부끄럽다. 어렵다고 하니까 첫 번째 버전을 풀어쓰다 보니 양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버렸다.)
많은 유명한 연구자들이나 교수들이, 감사하게도 죽지 못해 사는 게 인간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번쩍번쩍 빛나는 고상하고 교양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인간의 착각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뇌는 그냥 언제나 ‘죽어라 죽어라’, 하고 ‘힘들다 힘들다’, 하게 프로그램되어있다. 공중전화기로는 인터넷을 할 수가 없다. 공중전화기는 반드시 동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구멍에다가 동전을 딸각딸각 넣어줘야만 한다. 공중전화에다 대고 막 화를 내면서, ‘아 이거 인터넷도 안 되고, 화면도 없어서 답답하고’라고 한 들 소용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공중전화 같은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마치 스마트폰 급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고 교수들은 말한다. 우리 눈에는 적외선이나 자외선이 안 보인다. 우리 귀에는 저주파 소리가 안 들린다. 말 그대로 들릴 수 있는 것만 듣고,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때로는 어떤 감정 상태냐 따라서, 뭐 긴장했냐, 들떠 있냐에 따라서 이상하게 보고 듣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것과 저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내 귀로 똑똑히 들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곧잘 자신한다.
(1)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말한다. (나는 철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떤 전문가들의 생각을 많이 접한다. 이 사람이 뭘 말하는 건지 알아보기도 전에 이미 내 마음은 ‘아, 이름부터 어렵다 어려워’ 하면서 슬금슬금 문을 닫는다. 그러면 ‘마이클 가자미씨가 말한다.’로 속으로 고쳐 읽으면 조금 마음이 편안해진다. 친근하게 생긴 물고기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자미가 말했든 가자니가가 말했든 내용은 똑같으니깐)
당신이 특정 순간에 의식하는 견해는 거품이 생기듯 불현듯 일어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그 순간에 다른 견해들을 이기고 지배력을 쥔 견해이다. 당신의 머릿속은 서로 다른 시스템들이 당신의 의식적 인식이라는 상을 놓고 의식 표면에 떠오르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게 하는 세계이다.
거품이 일었다는 것은 정말 순식간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자기 멋대로 머릿속에 ‘팅’ 떠오른다는 뜻이다. 다른 견해들을 이겼다는 건 우리 머릿속에는 정말 많은 생각이나 감정들이 살고 있고, 그것들이 서로 주인공이 되어 보겠다고 다툰다는 말이다. 무대에 환한 조명을 받으면서 설 수 있는 배우는 딱 한 명이다. 오로지 주인공만 있고, 조연배우는 없다. 그냥 자기 혼자서 다 해 먹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주인공이 정말 빠른 속도로 갈아치워 진다. 주인공이 되려는 많은 후보들이 누군가 무대에 서기만 하면 머리끄덩이를 잡아 끌어내리고 밀치고 경쟁이 장난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는 슬픈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즐거운 생각을 같이 하지는 못한다. 한 번에 한 가지 생각을 한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생각이라는 건, 거품처럼 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거품처럼 생기는 것에 교체되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왔다 나가기 때문인데, 어쨌든 무대에 서는 건 딱 한 개다.
(2)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나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다. 가끔씩 내가 내 감정이나 욕망이 마치 내가 그것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잘 다스려지지 않듯이 남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니, 나 스스로 자과감에 빠져서 나를 심각하게 바라볼 일도 없고, 남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일도 없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정말 일리가 있다. 나는 한 번도 여기쯤에서 수치심을 느껴야지 하고,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어서, 수치심을 느낀 적이 없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수치심을 느끼고 자괴감을 심하게 느낀 적은 있다. 내가 그렇게 하기 싫다고 하는데도, 이미 감정이 나를 덮친 뒤다. 인간은 우리 몸의 장기가, 예를 들어서 대장, 소장, 심장 같은 것들에는 좀 마음 씀씀이가 괜찮다. 대장은 알아서 우리가 먹은 음식을 똥으로 만들어 주고, 심장도 스스로 알아서 쿵쾅쿵쾅 잘 뛰어주면 이건 고마워해 야할 일이지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다. 이런 장기들이 제 기능을 잘해주고 있으면, 내 몸이 아주 건강하다는 뜻이니 좋은 일이다. 이런 장기들이 알아서 잘해주고 있는데 아무 불만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 아이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는 괜찮다고 말한 이유다. 그런데 어쩐지 뇌가 우리랑 상관없이 자기가 알아서 하고 있다고 하면 썩 기분이 좋지 않다. 혹은 불쾌하기까지 하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이나 느낀 감정들이 뇌가 알아서 했다고 하면 자기 주도권을 빼앗긴 것처럼 싫어한다.
(3) 스티븐 핑커 (스핑크스나 핑클) 교수는 말한다.
우리의 영혼 저 깊은 곳에 진짜 나란 것은 없으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그 자아조차도 일종의 시스템이다. 우리 마음에서 바로 전과는 다른 생각이 주도권을 쥐게 만드는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느낌’이다.
다중인격은 인격 장애다. 나는 다중인격 장애는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인격이 나타날 때마다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 완전히 다른 말투에다가 행동까지 바뀌는 그런 경험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조성모의 가시나무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적인 있다.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아서 불편하고 답답한 느낌은 종종 가져보았다. 회사에서 회사 동료들을 대할 때 하는 행동과 말투가 집에서 가족들을 대할 때 하고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데면데면한 사람들을 대할 때와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할 때가 다르다. 시기적절하게 어떤 상황마다 가면을 바꿔 쓰고 있다고는 생각을 할 것이다. 정말 꼴도 보기 싫지만 나와 중요한 일을 함께 진행 중이고 나의 승진과 직접 연관이 있는 직장상사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할 것이고,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는 동료 앞에서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척하면서 속으론 딴청을 피우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자아고, 이렇게 많은 자아가 있다고 할 바에야 그냥 그때그때 주도권을 쥔 감정이 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스티븐 핑커는 자아는 일종의 시스템이며, 진정한 자아 같은 건 애초에 없고, 한 묶음의 수많은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하자만 [인사이드 아웃] 같은 것이다. 한 소녀의 머릿속에는 다섯 명의 작은 사람들이 사는데, 이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두뇌 속에 시스템을 운영하고, 이것에 따라서 소녀가 움직인다. 이 작은 사람들은 각각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라는 감정을 담당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이야 너무 많은 출연자들을 두면 정신이 없으니까, 다섯 가지 감정을 추려서 소녀를 움직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많은 감정이 존재한다. 말로 표현이 다 안 될 정도로 많다. 왜냐하면 기쁘다는 것만 하더라도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 기쁜 것과, 오늘 점심에 내가 좋아하는 메뉴가 나와서 기쁜 것, 그리고 내가 복권에 당첨돼서 기쁜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르게 때문이다. 홀가분함, 행복함, 사랑스러움, 기쁨, 반가움, 즐거움, 통쾌함, 자랑스러움, 재밌음, 살맛남, 신바람이 남, 날아갈 듯함, 자유로움, 화사함, 따사로움, 감미로움, 흐뭇함, 상쾌함, 뭉클함, 온화함, 정다움, 상큼함, 황홀함, 찝찝함, 괴로움, 답답함, 억울함, 우스움, 허무함, 초조함, 짜증스러움, 쓸쓸함, 어이없음, 야속함, 외로움, 불안함, 불쾌함, 당황스러움, 부끄러움, 따분함, 미움, 부담스러움, 불행함, 얼떨떨함, 서글픔, 애석함, 적적함, 비참함, 처량함, 조마조마함, 울적함, 허탈함, 창피함, 원망스러움, 권태로움, 안타까움 같이 셀 수도 없는, 인간의 언어로 정해놓지 않은 많은 감정이 있다. 게다가 여러 가지가 뒤섞인 하나의 감정이 나올 수도 있다. 가령, 딸기와 키위, 그리고 바나나 세 가지 과일을 믹서기에 갈아 넣은 과일 주스 같은 것이다. 딸기주스도 아니고, 키위주스도 아니며 바나나 주스도 아니다. 딸기, 키위, 바나나를 한꺼번에 갈아 넣은 어떤 한 가지 맛인데, 이것처럼 불행함과 서글픔에다가 찝찝함을 더한 그런 감정까지 있다고 치면 정말 감정이란 무한대다.
(4) 다시 가자니가 교수로 돌아가서,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실제로 태어날 때부터 뇌에 장착되어 있는 것 중 하나로 공평함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보니, 그래서 사람들은 남들과 차별대우를 받거나, 자기가 손해 보겠다 싶은 일은 극도로 꺼리는 것인가 싶다. 나는 언니 둘에 오빠가 한 명인데, 우리는 아이스크림 개수를 가지고 정말 많이 싸웠다. 부모님은 우리가 또 싸울까 봐, 아이스크림 종류와 숫자를 딱 맞게 사 오셨다. 만약에 한 두 개가 남으면 상황이 애매해지기 때문에 4개를 사 오거나 8개, 혹은 12개를 사서 공평하게 자기 아이스크림을 지정하고 각자 자기 것을 꺼내먹도록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명절에는 이런 경우도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이 있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게 남들에게만 좋고 나에게는 좋지 않으면 기분이 퍽 상한다. 시어머니에게는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친척들 모두가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는 가운데, 아무 소리 없이 내가 설거지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이 평화로운 상황으로 결과가 좋다. 시동생이나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음식 하는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설거지하는 일도 누구도 자기들이 하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던 대로 가만히 있고, 이 집에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순순히 설거지를 한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니 평화로운 상황으로 결과가 좋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설거지는 상징적인 문제다. 어머니 세대 분들이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셨으니, 노동을 분담하는 의미로, 내 세대에 남편이나 시동생, 숙모네 아들들과 딸들은 설거지쯤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만일에 내 세대에 일할 사람이 나뿐이라면 나는 흔쾌히 설거지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내 세대에 같이 일할 만한 사람이 많이 있는데, 나만 일하는 사람이 되는 건 왠지 억울하다. 또 남의 자손을 손을 빌려서 자기 조상에게 예를 차리는 제사 자체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기 아버지 제사인데도 고모들은 상이 다 차려지고 제사를 시작하면 오거나, 혹은 오지 않아도 크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또 자기 아버지 제사인데, 아들들은 상이나 펴고, 밤이나 깎고, 양복이나 멀끔하게 차려입으면 그게 자기 할 일을 다 한 거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 그리워서, 일 년에 한 번씩 정해진 날에 추억하고 싶고, 생전에 못 해 드렸던 미안한 마음을 정성 들여 차린 음식으로 조금은 채우고 싶은 날이 제사라면, 자기 손으로 직접 음식을 장만하고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난번 추석에는, 당연히 내가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하려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가까운 친척 아주머니가 설거지가 쌓이니, 내 이름을 부르면서 어서 설거지를 하라고 할 때는 더욱 반항심이 생겼다. 내 남편도, 내 시동생도, 숙모님들의 아들딸들도 모두 한 자리에 있는데, 왜 남의 자손인 나를 부른담.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열에 아홉은 어김없이 내 쪽을 향해서 가르치려는 자세를 취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집에서 각자의 생계를 위해서 각자의 일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서로를 몰랐던 동안에 각자가 태어나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았느냐는 누가 누구의 우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이 못된다. 서로를 몰랐던 두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그 시점부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세기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30대와 50대가 만나더라도, 50대가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게 맞는지 충고하고 30대를 이끄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두 사람이 만난 순간부터 공평하게 5일 된 사이라던가 한 달된 사이 아니면 각자 서로에게 한 살이라고 말해야 한다. 서로가 인간적인 배려와 존중을 해야 하는 것이지 한쪽의 희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좀 특이한 건가.
(5) 도마베치 히데토 (도마도 – 토마토) 교수는 말한다.
뇌는 일처리를 똑바로 하지 않는다. 그건 정보처리 능력이 달려서 이다. 과거에 본 것을 이후에도 매 순간 다시 마주칠 때마다 새롭게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뇌는 교묘하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일처리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사실 친구나 가족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보고 있지 않다. 거기다 확실하게 봤다고 자기를 속인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는 과거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뇌는 우리가 ‘오늘도 이것과 저것을 분명히 봤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게다가 뇌는 저장된 정보를 꺼내 쓰는 일 조차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보지 않고 있으면서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일만 하고 있다. 뇌의 게으름에 속아 어쩌면 당신은 과거의 자신의 이미지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잘못된 이미지를 모두 걷어버리고 눈앞의 자신을 다시 한번 바라보자. 전혀 다른 누군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이 있다. 이거랑 비슷한데, 좀 더 재밌는 속담도 있다. 더위 먹은 소는 달만 보아도 헐떡인다. 우리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때, 친척 결혼식에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한 번 크게 난 적이 있다. 차 밖으로 몸이 튕겨져 나가 도로에 내동냉이 쳐질 정도의 큰 사고였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막 퇴원하고 몇 년까지는 차를 타면 몹시 불안해했다. 요즘도 차를 탈 때, 뒷좌석에 앉지, 절대로 운전석 옆자리에는 앉지 않는다. 이런 게 아마도 도마베치 히데토 교수가 말하는 뇌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닐까? 사고 당시와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는 평화로운 도로에서, 차에만 앉아있으면, 그때의 기억과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닌데도, 마치 사고 현장으로 소환된 것처럼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용감하게도, 죽기 전에 운전면허증을 따 보겠다며 자동차 운전학원에 등록했고, 매일 벌렁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학원을 다니더니 운전면허증을 결국 땄다. 과거의 자신의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잘못된 과거의 이미지를 모두 걷어버리고,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는 게 운전면허증으로 가능해졌다.
(6) 로버트 라이트 교수는 말한다.
내가 연구하는 진화심리학은 어떻게 뇌가 인생을 통제하고 뇌의 노예로 만드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전자를 잘 퍼뜨리는 인간은 부정확한 정신세계를 가져야 한다. 인간은 부정확하게 지금을 인식하고,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 뇌는 끊임없이 종의 번식을 위해서 인간에게 세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는, 목적을 달성했을 때 쾌락을 느껴야 할 것. 둘째는, 그 행위를 다시 하도록 쾌락은 일시적일 것. 셋째는, 쾌락이 곧 사라진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오로지 그 쾌락을 다시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나게 할 것.
만일 한 번의 성적 쾌락으로 큰 만족감을 느끼며, 그것을 평생 동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면,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활동은 더 이상하지 않게 될 것이며, 인간의 대가 끊길 것이다. 그래서 뇌는 인간을 일시적인 쾌락에 빠트리는 걸 즐긴다. 지금 느끼는 쾌락이 영원할 수 없고, 이 쾌락이 사라지고 나면 공허함이 남는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쾌락을 또 좇으려면 인간의 정신세계는 흐리멍덩하고 부정확해야 한다.
(7)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말한다.
인간은 하루 중 46%를 딴생각을 하는데 쓴다.
잡생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세계기록 감이 아닐까? 나만 이렇게 잡생각에 시달리나 자괴감을 느꼈는데, 대니얼 길버트 교수의 말을 들으니 위로를 받는 것 같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보고서로 적힐 만큼 어떤 연구를 거쳐서 나온 결과이지 않겠는가. 인간이 잡생각을 하는 데 무려 하루의 46%를 쓰는 것이다. 내 잡생각의 대부분은 예전에 있었던 기분 나쁜 일들,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하는 것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점쟁이도 맞추기 힘들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고민 혹은 환상 같은 것들. 어쨌든 지금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고, 저 너머에 대해서 붙들고 있는 모든 생각은 다 딴생각이다.
(8) 양현진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바닷물의 본성이 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닷물은 짜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고등어에게 바닷물이 짤까? 분명히 짜지 않을 거다. 인간이 마음대로 바닷물을 짠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때문이다. ‘바닷물 안에 염화나트륨이 있기 때문에’라는 대답은 완결된 답이 아니다. 내가 고등어와 다르게 염화나트륨을 짜다고 느끼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닷물의 본성이 짜서 우리가 짜다고 느끼는 게 아니다.
이런 유의 이야기의 대표주자는 매미다. 매미 하면 우리는 시끄러운 곤충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여름만 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너무나도 시끄럽게 울어서 짜증 나게 하는 매미. 하지만 매미는 7-8월에 짝짓기를 하고, 암컷이 나무껍질에 알을 낳아 애벌레로 변하면 땅속에서 나무 수액을 먹으면서 5-7년을 지낸다. 어떤 매미는 무려 17년이나 땅속에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 장마철쯤 땅 위로 나와서는, 바로 껍질을 벗어버리고 매미가 된다. 매미는 땅 위로 나와서 딱 7일만 살다가 바로 죽어버린다. 그리고 그중에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날은 고작 3일이 채 되지 않는다.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7년까지 땅속에서 묵언수행을 하던 녀석이 고작 3일을 울었는데, 과연 매미 보고 시끄럽고 성가신 녀석이라고 불러도 될까? ‘제가 17년 동안이나 정말 빈집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았는데, 딱 3일만 망나니처럼 뛰어다니고 마음대로 해볼 랍니다. 그리고 저 4일 뒤에는 죽어요.’라고 하는 윗집이 있다면, 아랫집에서는 웬만하면 다들 그렇게 하라고 할 것이다. 내 경험에만 의존해서, 한 마리 가고 한 마리 나와서 울어대고 서로 바통터치하듯이 3일만 울다가 죽어간 것을 가지고, 여름 내내 시끄러운 곤충이라고 오해를 했다. 진짜 매미의 개인적인 사정도 모르면서 나는 어찌나 이렇게 빠르게 매미의 참모습을 속단한 것일까?
가수 안예은은 SBS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했는데, 심사위원들로부터 아주 혹평을 받았다. 그녀는 홍연이라는 자작곡을 선보였는데, 이 노래는 영화 왕의 남자를 보고 영감을 받아서 연산군의 시점에서, 연산군의 마음을 담은 곡이었다. 대형 기획사 두 곳에서는 이런 평을 내놓았다. ‘제 취향의 음악도 아니지만, 특별함도 찾지 못했어요. 음악적으로 기발하거나 특별하지 않아요. 독특한 헤어스타일만큼 개성이 넘치는 곡이긴 한데, 가장 큰 문제는 전혀 공감이 안 된다는 거예요.’ 두 거대 소속사 모두 탈락을 결정한 가운데, 나머지 하나 남은 소속사 대표가 입을 뗐다. ‘콘셉트가 되게 세네요. 이게 국내에선 되게 생소한 거예요. 되게 재밌는 것 중 하나가 반주는 뻔한 코드인데, 노래는 아주 묘하게 부르니까 모던 사극 주제곡 같았어요. 이런 가수가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는데, 낯설지만 존재 의미가 분명해요. 사실, 없으니까 생소한 건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거 아주 좋아해요. 저는 독특하다는 관점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드립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안예은은 MBC 드라마 역적의 OST 10곡 중 총 7곡의 자작곡을 실은 쾌거를 달성했다. 그중에서도 시청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는 오디션 당시 불렀던 홍연이었다.
홍연
작사, 작곡: 안예은
세상에 처음 날 때
인연인 사람들은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이어진 채 온다 했죠
당신이 어디 있든
내가 찾을 수 있게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이어진 채 왔다 했죠
눈물진 나의 뺨을 쓰다듬어 주면서도
다른 손은 칼을 거두지 않네
또 다시 사라져
산산이 부서지는 눈부신
우리의 날들이
다시는 오지 못할 어둠으로 가네
아아 아아아 아아아
고운 그대 얼굴에 피를 닦아주오
나의 모든 것들이 손대면 사라질 듯
끝도 없이 겁이 나서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했죠
아픈 내 목소리에 입 맞춰 주면서도
시선 끝엔 내가 있지를 않네
또다시 사라져
아득히 멀어지는
찬란한 우리의 날들이
다시는 오지 못할 어둠으로 가네
산산이 부서지는
눈부신 우리의 날들이
다시는 오지 못할 어둠으로
당신은 세상에게 죽고
나는 너를 잃었어
돌아올 수가 없네
다시 돌아올 수가 없네
아아 아아아 아아아
고운 그대 얼굴에 피를 닦아주오
평가는 평가하는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 평가라는 건 결국 한 인간의 짧은 생애 동안에 겪은 짧은 경험과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다. 그 평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시시때때로 계속 변해 가는데, 그 변화과정의 짧은 순간일 뿐이다.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한다는 것은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니 남의 판단에 마음을 쓰며 매달릴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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