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아놔, 갓댐 망할 무릎! 불광천 옆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찌릿한 무릎 통증에 욕이 절로 나오면서 속에서는 열불이 난다. 기껏 큰 맘먹고 마라톤 양말에 땀 흡수 머리끈도 하고 나왔는데. 땀에 절은 티셔츠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건강해지자!' 결심하고 달리기 시작했는데…10분도 못 채우고 이 모양이라니. 얼마 전 고혈압, 고지혈증 진단받고 시작한 러닝. 러닝하면 좋아지고, 스트레스 해소 되고, 체중을 감량하고 어쩌고 저쩌고. 근데 난 왜 이모양이지. 으아 난 기안84도 안 되는 녀석인가.
솔직히 나 정도면 과체중이긴 하지만 옆부서 달마 부장님에 비해서는 평균체중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 무릎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스트레칭도 충분히 했는데 대체 왜! 옆으로 젊은 러닝크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역시 젊은 몸이 좋네..' 노부부가 천천히 뛰면서 멍하게 앉아있는 나를 흘깃 쳐다본다. 아니, 내 몸뚱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못 따라가나. 괜히 쪽팔리다.
왜 이러지? 예전엔 밤새 술 마시고도 거뜬했고, 축구 몇 시간씩 뛰어도 멀쩡했는데... 도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갑자기 훅 간 거야? 이 몸뚱이가 너무 서글프다. 이렇게 아픈 몸뚱이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이게 진짜 '나' 맞나? 이 고장 난 기계 같은 몸이 너무 낯설다.
"아이고, 그 무릎 좀 아프겠네. 뛰려다 그런 모양인데."
공원벤치에 축 늘어져 있는데, 머리가 희끗한 50대 같은 아저씨가 말을 건다. "예, 예" 기분도 안 좋은데 대화하고 싶지 않다. 대충 읊조린다. 얼굴을 쳐다보니 눈매가 날카로우면서 맑다. 맑눈광이다. 아까 보니 계속 에어팟을 들으면서 뭔가 흥얼거리며 천천히 걷고 있던 사람이다. 마치 시원한 바람을 음악과 함께 만끽하는 듯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어서 좀 피해 갔었다. 아저씨는 끼고 있던 에어팟을 빼면서 환하게 웃는다. 대화하긴 싫었는데, 무릎은 아프고 힘들어서 딴 데로 갈 힘도 없다. 이제 말 안 걸겠지.
메를로퐁티: 아이고, 아저씨. 인상 팍 쓰고 있네. 무릎 아파?
나:... 예. 좀 아프네요. (뭔데 반말이야?)
내 떨떠름한 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얘기한다. 얼마 전 탔던 택시아저씨와의 대화처럼 일방적이다.
메를로퐁티: 뛰려 그랬지? 젊을 때 생각하고?
나:... 맞아요. 근데 무릎이 영 시원찮아서요. 몸이 말을 안 듣네요. 고장 났나 봐요.
메를로퐁티: 고장? 에이, 무슨 고장이야. 네 몸이 무슨 냉장고냐? 스위치 켜면 바로 돌아가게? 야, 잘 들어봐. **네 몸이 고장 난 기계가 아니라, 그냥 네 몸이 지금 그렇게 된 거야!**1
순간 짜증이 솟구친다. 자기가 뭘 안다고 그래.
나: 아 그게 그거 아니에요? 옛날처럼 안 움직인다는 거죠~!
메를로퐁티: 옛날처럼? 옛날 몸이랑 지금 몸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움직여? 네 몸은 네가 세상을 만나는 필터 같은 거거든. 옛날 몸은 세상이랑 만날 때 '쌩쌩!' 하는 필터였고, 지금 몸은 아프니까 '아야...' 하는 필터가 된 것뿐이야.
나: 필터가 바뀌었든 뭐가 바뀌었든, 결과는 아파서 못 움직인다는 거잖아요. 이게 제 몸이라는 게 너무 짜증 난다고요.
메를로퐁티: 서글프다고? 야, 서글픈 것도 네 몸이 느끼는 거야. 네 몸이 너랑 딱 붙어서 하나2거든. 몸은 몸이고 나는 나고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 네 손으로 뭘 만지면 손이랑 만져지는 거랑 따로따로 느끼냐? 만지는 느낌 자체3가 손과 만져지는 게 같이2 만드는 거잖아. 아픔도 그래. 아픔은 네 몸이 세상이랑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다2는 신호야.
나: 신호? 아픈 게 신호면 '이제 그만 망가져라'는 신호 같은데요.
메를로퐁티: 망가지긴 뭘 망가져. 그냥 모양이 바뀐4 거라고. 생각해 봐. 너 어릴 때 몸이랑 지금 몸이랑 같냐? 다르잖아? 그것처럼 계속 바뀌는 거야. 애벌레가 나비 되는 거 보고 '망가졌네!' 하냐? 아니잖아. 그냥 다른 모습으로 사는 거잖아. 네 몸도 그래. 예전 몸만 진짜 네 몸이고 지금 몸은 가짜5라고 생각하는 거, 그거 네 머릿속 착각6이야."
나: 착각이라뇨... 뛰고 싶어도 못 뛰는데 이게 어떻게 진짜 저예요?
메를로퐁티: 뛰고 싶은 '생각'은 네 머리가 하는 거지. 네 몸은 지금 여기7 앉아서 아프다고 말하고 있잖아. 네 몸은 네가 옛날에 신나게 뛰었던 걸 기억8해. 근데 동시에 지금 아픈 것도 느끼고 있지. 이게 네 몸이 지나가는 시간9이야. 과거만 진짜가 아니고, 아픈 지금 이 순간7도 진짜 네 몸이고 네 시간이라고.
(내가 나라고? 그래 지금 몸은 '내'가 맞지. 너무 옛날 생각만 했나.)
나: 그렇죠.. 아픈 것도 진짜 저라는 거죠... 그렇긴 하죠.
왠지 서글퍼서 말끝이 흐려진다..
메를로퐁티: 그렇지. 네 몸이 보내는 소리(아픔)를 좀 귀 기울여 들어봐10. 억지로 옛날처럼 '쌩쌩'해야 한다고 밀어붙이지11 말고. 네 몸이 아프다고 말하면 '아, 지금 내 몸은 이렇게 느끼는구나' 하고 그냥 느껴줘. 그리고 이 아픈 몸으로도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2 만날 수 있는 걸 찾아봐. 꼭 달려야만 세상을 만나는 건 아니잖아?
(흠. 고장 난 기계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모양이 바뀐' 거라고? 아픈 것도 내 몸이 세상을 만나는 방식이라고? 머릿속으로 '건강해야 해!', '뛰어야 해!' 했던 게 오히려 지금 내 몸의 소리를 무시하고 강요한 거 아닌가. 예전의 나만 '진짜 나'라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나보다.)
나: 그래요. 지금 내 몸이 나라는 건 인정해요. 그래도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더 나은 몸을 생각해야 하는 거 아녜요? 이대로 아프고 힘든 몸으로 계속 살 수는 없잖아요
메를로퐁티: "음... '더 나은 몸'이라... 그 '더 나은 몸'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 옛날에 안 아팠던 그때 몸이야? 아니면 머리로만 상상하는, 잡을 수 없는 완벽한 몸이야?"
나: 옛날처럼 안 아프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이죠. 그래야 건강해지고, 혈압이랑 고지혈증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도 나와버렸다.)
메를로퐁티: 네 몸은 네가 뭘 하려 할 때 비로소 움직이는 게 아니야. 네 몸은 그냥 이미 세상 속에서 살고 있고2, 그러면서 계속 변하고 다른 식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지. 마치 새로운 춤을 배우는 것처럼.
나: 새로운 춤이요? (갑자기 웬 춤얘기?)
메를로퐁티: 그래. 네가 새로운 춤을 배우려면 몸을 새롭게 움직여야 하잖아? 옛날 생각하고 브레이크 댄스를 추려고 하면 안 되지. 네 몸은 지금 이 몸으로 새로운 스텝을 익히고, 새로운 리듬에 맞춰 슬로우댄스로 세상을 느끼는 거야. 옛날처럼 쌩쌩 뛰는 게 아니라, 천천히 걷는 새로운 리듬일 수도 있고.
나: 근데 아프잖아요. 새로운 춤이고 뭐고 아프면 아무것도 못하죠.
메를로퐁티: 못 하는 것만 보지 마. 네 무릎이 아프다고? 그럼 그 아픈 무릎으로 걸을 때 세상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귀 기울여 들어보자10는 거지. 달리던 시절의 몸 사용법만 생각하지 말고. 그게 네 몸이 지금 만들 수 있는 다음 모습4을 찾는 거야. 억지로 옛날 지도(몸 사용법)를 들이대면서 아픈 몸이랑 싸우는 게 아니고.
나: 아픈 몸이랑 싸우지 말고... 아픈 몸으로 할 수 있는 걸 찾으라는 건가요?
메를로퐁티: 그래. '더 나은 몸'은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게 아니야. 지금 이 네 몸이 세상이랑 더 잘 어울리는 방식2을 찾아가는 과정이지. 옛날처럼 쌩쌩 뛰면서 어울릴 수도 있고, 천천히 걸으면서 세상의 다른 소리를 듣는 방식으로 어울릴 수도 있지. 네 몸이 지금 여기서7, 이 모습으로 세상을 어떻게 느끼고 움직일 수 있는지 찾아보는 것. 그게 네 몸이 지금 연주하는 삶2의 새로운 멜로디를 찾는 길이야.
아저씨는 그렇게 얘기한 다음 씩 웃더니 다시 에어팟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뒷모습을 보니 아까 흐느적거리며 걷던 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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