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아를레킨과 다시 작별 인사를 나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를레킨
안녕히 가십시오.
의사는 주저하듯 나가다 멈추어 선다.
아를레킨
혹시 뭘 잊으셨습니까?
의사
그러는 선생님께서는 뭐 잊으신 것 없습니까? (생략) 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왕진료 내는 것을 잊으셨거든요.
아를레킨
당신이 저를 고쳐주셔서 제가 건강해지면, 그때 받으시게 될 겁니다. (생략)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좀 나아지고 당신이 주신 처방이 효과를 발휘하면 그때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누가 알겠습니까! 당신이 새빨간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내가 왜 돈을 내야 합니까?
의사
정 그러시다면 이렇게 말씀드려야겠군요. 저기 말입니다... 선생님의 건강 상태로 보건대 아마 내일까지도 사실 수 없을 겁니다.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여섯 번째 작품은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의 '즐거운 죽음'입니다.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Евреинов, Nikolai Evreinov, 1879–1953)는 러시아 출생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연극 이론가로, '삶의 연극화'라는 이론과 함께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연극화할 것을 강조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오락이나 극작을 위한 희곡이 아니라 지독한 냉소와 구원을 향한 절절한 열망을 담습니다. 그의 어떤 평생 화두를 대변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저열한 진리의 어둠보다는 우리를 날아오르게 하는 기만이 더 소중하네!'
제가 선택한 장면은 죽기 직전의 아를레킨이 친구 피에로의 아내 콜롬비나와 사랑을 나누며 키스를 하는 장면입니다.
피에로는 절친한 사이의 아를레킨에게 무슨 말을 하기엔 몇 시간 뒤면 죽게 될 몸이고, 아내 콜롬비나에게도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주눅이 든 상태로 얼버무립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아를레킨
두려워하지 마, 콜롬비나! 무서워하지 말고 들어와. 내가 이미 피에로를 설득했어. 맹세하는데, 피에로도 동의했다고.
콜롬비나
(피에로에게 달려든다.) 동의했다고? 아, 그러셔? 동의를 하셨다고! 이 형편없는 놈. 지 마누라를 그렇게 건사하는구나! 마누라가 바람을 피워도 너한텐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거지! 아무 상관이 없어! 대답해! (피에로를 때린다.)
피에로
(당황하여) 하지만 콜롬비나, 들어봐...
콜롬비나
뭘? 네 놈 연설까지 들으라고? 형편없는 남편 중에서도 제일 형편없는 남편 놈의 말을 들으라고...
피에로
하지만 콜롬비나... 한마디도 말할 기회를 안 주잖아...
콜롬비나
(피에로를 때리며)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복도 없는 년, 내가 이런 거지 같은 놈에게 시집을 왔다니! 저런 놈에게 가장 좋은 시절을 다 바쳤어! 그런데도 저 놈은 아내로서의 내 명예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그를 때린다.) 자! 자! 자! 이 거지 같은 놈아, 이거나 받아라!
피에로
(정신을 차리고)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야! 뻔뻔한 여편네 같으니! 여기 바람피우러 온 건 자기면서 감히 그런 말을...
콜롬비나
됐어! 닥치라고! 난 당신 같은 사기꾼들의 수작을 잘 알아. 자기가 잘못하고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오히려 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하지. 하지만 나한테는 어림없어. 이 한심한 놈아.
오히려 더 뻔뻔하게 나오는 콜롬비나입니다.ㅎㅎ
콜롬비나
나한테 키스해요, 아를레킨! 사랑스럽고 멋진 아를레킨!
아를레킨
거절을 하면 당신이 화를 낼 테니... (키스한다.) 난 항상 친절한 기사였지. (키스한다.) 게다가 내 마음은 부드럽고, (키스한다.) 그건 애들도 알지. (키스한다.) 그리고 이 집의 주인으로서, (키스한다.) 난 손님들에게 친절해야하고, (키스한다.) 특히 대상이 (키스한다.) 세상의 아름다운 반쪽이라면 더 그렇지. (키스한다.)
피에로
(관객을 향해) 불쌍한 인간들! 저자들은 내가 이미 복수를 했고 그래서 아주 평온하다는 걸 몰라요.
콜롬비나
(아를레킨에게) 더 뜨겁게, 더 강하게, 더 세게, 더 아프게 입 맞춰줘요. 숨도 쉬지 말고 물어뜻듯이, 그렇게요.
피에로
(침착하게, 심지어 비웃으며, 여전히 관객들을 향해) 자기들이 내 아픈 곳을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콜롬비나
(아를레킨에게) 더, 더! (피에로에게) 아, 감정도 없는 괴물!
피에로
(콜롬비나에게) 하세요! 뭐든지 하세요! (관객들에게) 내 양심은 깨끗하다고요. 나는 내 명예를 지켰고, 흥분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이 말입니다.
콜롬비나
(아를레켄에게) 내 눈에, 이마에, 뺨에, 턱에, 관자놀이에 키스해줘요. 내 머리카락 끝이 닿는 목 부분, 당신의 키스로 달콤한 전율이 흐르는 거기에 입 맞추어주세요.
피에로
난 상관없어. 하고 싶은대로들 하라지. 나는 모욕당한 남편 역할을 다 했고, 기분이 아주 좋다고.
콜롬비나
저런, 저런 몹쓸 놈! 넌 이게 아무 상관없단 말이야?
피에로
(객석을 향해 행복하게 웃으며) 내 침착한 모습으로 저자들을 미치게 만들 겁니다.
(생략, 콜롬비나도 이내 아를레킨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를레킨
울지마, 콜롬비나! 난 입술에 미소를 띤 채 여기를 떠날 거야. 난 말이야, 늦은 저녁 지쳐서 휴식이 필요할 때, 잠을 좀 자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죽고 싶어. 난 원 없이 내 노래를 불렀어! 원 없이 즐거움을 누렸고! 원 없이 웃었어! 내 힘과 건강, 그리고 돈도 즐겁게 써버렸지! 한 번도 인색했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늘 즐겁고 속 편했어. 난 아를레킨이고, 아를레킨으로 죽을 거야. 울지 마, 콜롬비나!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인생을 충분히 즐기고 운명과 지나온 삶에 만족하며 죽어가는 걸 기뻐해줘야지! 아니면 당신은 내가 탐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입으로는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걸 보고 싶어? 아니, 아를레킨은 그런 존재가 아니야. 이생에서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평안히 죽어야지! 정말이야! 내가 내 키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의 키스를 퍼부어주지 않았나?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내 영혼을 탕진해버리지 않았나? 한심한 남편의 마누라들을 내가 얼마나 많이 위로해줬는데!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을 얼마나 많이 우롱해줬는데! 열정적인 노래로, 가차 없는 몽둥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일깨워주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줬는데! 난 내 삶을 다 살아냈고, 죽음이 가져갈 건 껍질 한 장뿐이야! "순간을 잡아라" 이게 내 좌우명이지! 더는 잡을 순간이 없을 만큼 많이도 잡았지! 한 번의 키스, 한 모금의 포도주, 한 번의 신나는 웃음, 그거면 됐어!
(생략, 아를레킨은 '죽음'이라는 여성과 함께 무대에서 사라진다.)
피에로
(관객들을 향해) 자, 이제 이걸 어쩝니까. 정말 모르겠어요. 먼저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할까요? 아를레킨을 잃은 걸 슬퍼해야 할지, 콜롬비나를 잃은 걸 슬퍼해야 할지, 나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이토록 경솔한 작가의 공연을 보신 친애하는 관객 여러분의 운명을 슬퍼해야 할지. 도대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해를 못하겠어요. (생략) 그나저나 이 이상한 공연, 우리끼리 얘기지만, 관객 모독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 공연의 작가가 저한테 끝에 무슨 말을 하라고 시켰는지 아시게 되면, 아마 더 놀라실 겁니다. 쉿! 들어보세요! "천재적인 작가였던 라블레가 죽을 때, 그의 침상 곁에 수도승들이 모여들어 온갖 방법으로 라블레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설득했습니다. 라블레는 그저 웃기만 하다가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자 오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을 내리시오, 광대극은 끝났소!' 그러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양심 없는 작가가 도대체 왜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입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말을 하는 건지 정말이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양심적인 배우인 저는 끝까지 착실한 배우로 남아, 작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다음과 같이 오만하게 외치겠습니다. "막을 내리시오, 광대극은 끝났소!"
이렇게 피에로가 실없는 얘기로 주절대다가 극은 막을 내립니다. 어떤가요? 왜 작품 제목이 '즐거운 죽음'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피에로는 왜 말하지 못했을까요? 침묵과 우스꽝스러움을 택한 걸까요?
2. 죽음을 앞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고백일까요, 침묵일까요?
3. 자기 연민은 진실인가요, 회피인가요? 그것은 불쌍한가요, 우스꽝스러운 건가요?
4. 내가 생각하는 '좋은 마무리'란 무엇인가요?
5. 이 희곡처럼 어설프게 마무리되기에 오히려 진실한 것이 있을까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포기될 뿐이다.
-폴 발레리-
오늘의 속담입니다.
장비더러 풀벌레를 그리라 한다.
세상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부탁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