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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말하는 아내의 자격

「희극의 파편」3. 모리모토 가오루 - 여자의 일생 中

by 재준

후사코(후미의 언니)

난처하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노세 씨(후사코에게 선 보러 온 남자)가 (후미의 남편)매제하고 장기를 시작해 버렸지 뭐야. 오라버니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책이나 보고, 나는 어디에서 뭘 해야 하는 거냐고.



후미


아니, 선보러 와서 장기를 둔다는 게 말이 돼.



후사코


그게 장기 두자고 말을 꺼낸 게 매제(후미의 남편)라고.



후미


어이가 없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니까. 때와 장소를 전혀 생각을 못 해. 근데 선보는 자리라는 게 인사 끝나면 당사자들만 남겨놓고 다들 물러나면 되는 거 아냐? 언니가 옆에 있어 달라고 그러니가 득의양양하게 눌러앉아 있었던 거잖아. 반은 언니가 잘못한 거야.



후사코


아니... 둘이서만 남으면 내가 난처해지잖아. 무슨 얘기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후미


이야기 같은 건 언니가 생각 안 해도 상대방이 다 해 줘. 선보는 게 처음도 아니고 말이지.



후사코


됐어. 번번이 선본다고 폐를 끼쳐 미안하다. 이제 집에 가도 돼.



후미


아니, 나는 전혀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야.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되잖아.



후사코


정색할 만하지. 말이라도 조심해 주면 좀 좋아. (생략) 그만해. 나한테는 웃을 일이 아니라고. 이제 정말 선보는 거 질렸어. 선볼 때마다 가슴이 울렁울렁거리고, 전전긍긍하다가 수명이 줄어들 것만 같다고. 이제는 정말 선 자리에서 은퇴해도 될 것 같은데, 아직 안 돼. 나 자신한테 화가 나. 요전에 아무 생각 없이 사진관 앞을 지나가는데, 진열창 유리에 내 기모노의 긴 소매가 보이는 거야. 눈을 감고 뛰었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히쭉대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 (눈물을 훔친다.)



후미


언니... 언니 왜 그래, 갑자기...?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세 번째 작품은 모리모토 가오루의 '여자의 일생'입니다.

일본 출생 모리모토(森本 薫, 1912–1946) 극작가는 만 34세에 결핵으로 요절했지만, 왜곡되지 않은 인간 관계와 여성 심리를 각인시키는 연극 작품들은 지금도 연출되고 읽히며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일상 속의 어설픈 유머와 삶의 중후한 문제들을 교차시키며, '가족'과 '여성의 삶'을 정교하게 조명하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제가 선별한 장면 또한 가족간의 '소소하지만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거리들'을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신타로(후미, 후사코의 오빠)


왜 그러는데? (누운 채로)



케이(신타로의 아내)


당신, 말해 봐요. 도대체 내 어떤 점이 나쁘다는 건데요?



신타로


...



케이


그런 식으로 입 꼭 다물고 있는 거,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난 무엇이든 당신처럼 속에 담고만 있질 못하겠단 말이에요.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매일 같이 지내는 거, 나는 견딜 수가 없다구요.



신타로


특별히... 뭐라고 말하고 고칠 것도 없지 않나...



케이


후사코 아가씨 선 자리는 거절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절대로 이노세(후카고에게 선 보러온 남자) 씨를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그 댁에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니까 자리를 마련한 거지, 거절을 한다고 해도 조금도 난처할 일은 없을 거예요.


(생략)



케이


그러면 그렇게 우울한 얼굴 하고 있지 않아도 되잖아요? 부족하긴 해도 나도 이렇게 전력을 다해 이 집을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요?



신타로


당신이 이 집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나도 충분히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걸로 됐다고.



케이


그 정도로 나한테 말하기 어려운 건가요?



신타로


아니, 말하기 어려운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게 맞을지 몰라. 굳이 말하자면 당신하고 나... 성격이 안 맞아.



케이


성격...



후사코의 선 자리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부부싸움으로 변질되는 그 과정, 그 리듬을 느껴보세요ㅎㅎ


웃픈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신타로


정말이지 당신은 일가의 안주인으로서는 아주 마음 씀씀이가 좋지. 가게 일부터 고용인에게 하는 지시, 부엌일부터 청소, 빨래, 이웃과의 교제, 무엇 하나 빈틈이 없어. 혼자서 잘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나는 감탄할 정도야. 하지만 여자란 그저 꼼꼼하고 일을 잘 하는 것으로 끝이 아냐. 여자에겐, 반드시 여자만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당신은 그게 없단 말이지.



케이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여자만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게 뭐란 말입니까?



신타로


유감스럽지만, 나도 그게 어떤 건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지는 못해. 그저 당신에게는 그게 결여되어 있다는 것만 아는 거지. 당신은 가게 일을 혼자서 거의 다 해내고 있어. 하지만 당신이 그 정도로 일을 안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이 모자라다고, 여자로서 마음 씀씀이가 미치치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후사코 일만 해도 그래, 당신은 끊임없이 온갖 정보를 긁어모으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보를 물고 오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냐.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당신이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당신을 쫓아갈 수가 없다는 마음이 드는 거야.



케이


당신, 그건 너무 하잖아요. 내가 이 집을 위해, 당신을 위해, 당신 동생을 위해 해 온 일들을 그렇게 하나하나 거꾸로 뒤집어서 보고 있다니 너무해요.



신타로


그러니까 당신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니까. 당신하고 내가 기질이 차이가 나니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생략) 혹시 당신은 내 아내가 되는 것보다 그 일에 대한 기대나 열의가 더욱 컸던 건 아 니었을까?



케이


당신, 그건 비겁해요. 그런 이야길 지금 와서 꺼낼 거면, 왜 지금까지 내가 하는 일을 입 다물고 보기만 했나요? 그렇게 내가 하는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면 되지 않겠어요? 오늘 밤 당신,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당신이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무턱대고 짐작대로 이야기한다고밖에 생각이 안 돼요. 나는 혼날 만큼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선생님에게 혼나고 있는 학생이 된 것 같네요. 그게 대체 뭔가요?



(생략, 신타로는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까지 꺼낸다.)



케이


당신, 그럼 당신은 지금까지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던 거예요...?



신타로


그만하자고. 지난 일이야. 너무 오래돼 버린 옛날이야기라고. (들어간다.)



케이는 맥이 풀려버린다.

툇마루 복도에서 쇼스케(신타로의 삼촌)가 나온다. 말없이 등나무 의자에 앉는다.

사이



쇼스케


인간이라는 놈들은 정말 잘도 잘못을 저지르지. 마치 잘못을 하기 위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너도 그 잘못한 인간들 축에 속하는 거냐?



케이


(강하게 고개를 들며)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골라 준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선택해서 걸어온 길인 걸요. 잘못인 걸 알아도 잘못이 아니 되도록 고쳐야지요.



어떤가요? 신타로의 발언이 조금 민감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1945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걸 감안해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엉뚱하고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라는 판단 하에 이 장면을 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신타로가 원하는 케이의 마음가짐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현대적인 맥락에서 그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가볍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질문 개수를 소폭 줄였습니다.




1. 신타로처럼 얘기하기 곤란한 발언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있나요?


2. 그 행동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남을 비난하기 위해서였나요, 아니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선한 마음에서였나요?


3. 후자라면 정말 그 마음은 선한 마음인가요?


4. 그럼 그런 말을 한 후 의도와 다르게 대화 양상이 흘러가던 적이 있나요?


5. 또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 마음을 잘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로 조리있게 말을 잘 하셨나요?


6. 우리 자신의 실존이, 아니 모든 언어가 주어진 현실을 포착하도록 말을 잘 할 수 있으신가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나는 심플하다. -장욱진-




오늘의 속담입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

'하찮거나 언짢은 일을 당해도 좋게 풀이하거나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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