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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갈나무 Oct 05. 2023

12. 엄마가 아이를 믿어줘야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만난 여러 선생님들 중에 내게도 스승이 되어준 분이 있어. 오늘은 그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줄게.


큰 아이는 입학하자마자 셰익스피어를 배우기 시작했어. 영어로도 쉽지 않은 셰익스피어를 고어 그대로 가르치더라. 영어 같기도, 알파벳을 쓰는 유럽의 어느 언어 같기도 한 언어에, 희곡으로 쓰인 원서를 교과서로 쓰면서. 얼마나 헤맸을지 짐작이 가지?


사전을 찾다가, 네이버도 들락거리다가, sparknotes라는 사이트를 찾아 모든 문장을 현대 영어로 바꿔도 봤지만 절대적으로 역부족이었지. 아이와 나는 한국에서 하던 대로 과외 선생님을 찾아보자 결론을 내렸어. 그런데 아는 사람이 없는 캐나다에서 우리가 무슨 수로 좋은 과외 선생님을 찾겠어. 그러다가 캐나다에서는 교사가 과외를 하는 게 불법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 담당 선생님께 과외를 부탁하는 건 여러모로 말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좋은 선생님이라도 소개를 받을 요량으로 아이의 선생님과 면담 약속을 잡았어.


검은 머리라곤 한 가닥도 없지만 눈빛에 총기가 가득한 선생님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를 잡은 다음, '과외를 해야 할 것 같다, 좋은 분을 추천해 주실 수 있느냐'는 본론을 꺼냈는데. 내내 뭐든 들어줄 것 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이 정색을 하시더니 '정말 그러고 싶냐?'라고 되묻더라.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엄마가 아이를 믿어야지."


"네 아이는 지금 막 달리기 출발선에서 출발했어. 자기가 걸을 수 있는지, 뛸 수는 있는지, 뛰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뛸 수 있는지, 아무것도 스스로 확인해보지 못한 상태라고. 그런데 너는 지금 그런 아이에게 목발을 쥐어주겠다는 거야? 정말 그걸 원해? 시작도 하지 않은 아이를 장애아(이 단어를 쓰신 건 아니지만)로 만들어버릴 셈이야? 네 아이는 충분히 완주할 수 있어. 그것도 멋지게 달려서. 내 눈에는 훌륭하게 완주한 네 아이의 모습이 보이는데, 엄마인 네 눈에는 그게 안 보여? 블라블라블라."


외국인들 눈에는 동양인의 나이가 가늠이 안 된 다더니, 내가 너무 어리게 보여서 자기 학생인 줄 아나? 명색이 학부모인 내게 저렇게까지 다다다 쏘아붙여도 되나? 이거 혹시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아니면 자기에게 부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빈정이 상한 건가? 단숨에 자기 자식도 못 믿고 잠재력도 못 보고 기다려줄 줄도 모르는 자격미달 엄마가 된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못 했어. 내 생각이 짧았다, 우리 아이를 잘 봐줘서 감사하다는 말만 남기고 악수도 없이 선생님 방을 나왔지.


어디서 과외 선생님을 구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자기 선생님이 잘할 거다 하셨다 하니, 아이는 혼자 힘으로 9학년을 끝냈어. 한국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캐나다에서 하는 공부량이 한국에서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자기가 모르는 게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을 떠나지 않았을 거라며 매 고비고비를 넘겼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는 걸 알았어. 자기 힘으로 공부한 아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파악할 줄 알게 된 아이의 실력은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늘었고, 결국 아이가 과제를 내면 우리 아이의 이름을 가린 채로 같은 학년 아이들에게 일종의 모범 답안으로 돌려보시게 하는 선생님들도 생기는 수준이 되었어. 


나는 지금도 캐나다 교육을 시작하자마자 이 선생님을 만난 것이 우리가 누린 큰 행운들 중 하나라고 여겨. 아이들을 키우면서 저 선생님의 가르침은 두고두고 내게 아주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었지. 당장 눈앞에 닥친 시험을 잘 보고 점수를 잘 받게 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를 크게 망칠 수 있다는 것, 박혜란 선생의 말대로 아이는 정말 믿는 만큼 자란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단련한 무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 49%의 성공은 어쩌면 저 선생님의 덕분이 아닐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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