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회사 발령으로 정착하게 된 통영. 올해 타 지역으로 발령이 났지만 천혜의 자연을 품은 통영을 뒤로 하고 떠날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 또한 작은 학교를 다니며 끈끈한 친구 관계를 형성해 놓은 터. 그네들 역시 떠나기 싫어하는 건 매 한 가지였다. 결국 온 가족이 원거리 통학·원거리 출퇴근을 감내하고 통영살이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아이들과 남편은 30분, 나는 무려 1시간의 거리를 이동하며 보람찬(?)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퇴근은 또 어떠한가.
집으로 가려면 또다시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사무실에 퇴근 음악이 울림과 동시에 부서장보다 먼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 부릉부릉 차에 시동을 건다.
그렇게 오매불망 통영만 바라보고 살다 보니 현 근무지가 있는 지역과는 정을 붙일 새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출퇴근 6개월 차가 넘어가니 이곳에도 나만의 힐링 스팟이 생겼다.
그곳은 다름 아닌 「농산물 도매시장」
도매 시장답게 계절감에 맞는 다양한 과일이 판매 중이었는데 그럼에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과일이 아닌 '경매 현장'이었다.
호오라. 경매는 드라마에서만 얼핏 보았지 눈으로 직접 보며 경험하는 건 처음이다. 신기한 눈으로 경매현장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경매사들은 마치 암호를 말하는 것 마냥 매우 빠른 속도와 리듬감으로 말을 뱉어냈는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경매사들은 '경매 콜(Auction Chant)'라 하는 언어를 쓰는데 기술과 리듬, 숫자가 결합된 전문화법을 쓴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하나하나하나 오백, 둘둘에 셋셋, 셋셋 오백 나왔습니다. 넷넷 들어올게요~"라는 경매사의 말은 "1,500원 나왔고, 22,000원, 33,000원, 33,500원 나왔습니다. 이제 44,000원 받을게요"라는 뜻이라 한다. 허허허.
이들의 빠르고 독특한 말투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경매를 진행해야 하기에 빠른 것도 있고 단가를 은근히 전달함으로써 나름 심리전을 유도하는 의도도 담겨있다고 한다.
오늘의 경매는 애호박이다!
때마침 오늘의 경매가 시작되었고 경매사의 리듬감 넘치는 말 아래 관계자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어 제품을 살피기 시작했다.
평소 애호박을 꽤나 좋아하는데 와... 이렇게 많은 애호박 꾸러미들을 보는 건 처음이다.
경매를 마친 물품들은 차곡차곡 탑을 만들어가며 부지런히 쌓아 올려졌다.
경매현장을 실컷 보았으니 이제 과일 구경에 나설 차례다.
농산물 도배시장을 돌다 보면, 과일의 계절감에 대해 확연히 느끼게 된다.
두어 달 전까지는 빠알갛고 통통한 딸기가 주를 이루더니 이내 수박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어 등장한 작고 귀여운 산딸기!! 아들 녀석이 평소 산딸기에 환장하는 지라 몇 번이고 산딸기에 눈길이 갔지만 12,000원이라는 비싼 몸값에 쉬이 손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출시 직후만 지나면 가격이 점차로 낮아지는 법. 지난주에는 8,000원이던 몸값이 이번 주에는 7,000원까지 내려오니 이거 원, 안 사고 배길 턱이 없다. 그리하여 작고 귀여운 산딸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번 주에는 복숭아와 자두가 새로 등장하였다. 가만 보자. 메모지에 적혀있는 게 뭐지?
신비복숭아?!
예전에 과일가게 사장님의 추천으로 '추희 자두'라는 가을 자두를 먹어보았는데 맛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크게 실망한 뒤 과일로 모험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웬일인지 사무실에 와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살짝 검색이나 해볼까? ^^
포털 사이트에 '신비복숭아'를 쳐보았더니 어멋! 실로 인기가 대단했다.
신비복숭아는 천도복숭아의 한 종류인데 전체 천도복숭아 생산량의 1%에 그친다고 한다. 겉모습은 천도복숭아인데, 반을 갈라 보면 속살은 백도복숭아처럼 하얘서 '신비'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거기다 1년에 약 1~2주, 길어도 2~3주 정도만 수확할 수 있는 특수 품종 복숭아이기에 '복켓팅'이 치열하다고 한다.
복켓팅? 복켓팅이 뭐지?
요즘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챗GPT에게 물었다. 복켓팅이란 '복숭아+티켓팅'을 합성한 신조어로 복숭아 구매가 인기 가수의 공연을 티켓팅(예매)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뜻이란다. 하핫.
심지어 복켓팅 성공 팁까지 돌고 있었다.
이처럼 신비로운 과일이 곧 모습을 감추어버릴까 하여 다음날 바로 '신비복숭아 사냥'에 나섰다.
사장님께 값을 치르며 물었다.
신비복숭아는 후숙 해야 먹어야 더 달콤하다는데 여기서 더 후숙 해야 할까요?
"에잉~ 그럼 맛없어요. 신비복숭아는 딱 지금 이 상태가 좋아. 물러터지면 맛없어"
"인터넷에서는 후숙 해야 더 맛있다던데요"
"그럼 지금 하나 먹어볼래요? 내가 한 알 줄게.
다 개인 취향이지만 나는 말랑한 신비복숭아는 맛없더라고"
주고받은 대화 끝에 주어진 신비복숭아 한 알.
까드득~~
호오~~ 식감은 천도복숭아마냥 단단한데 속은 백도처럼 하얗다. 한데 맛은...... 기대만큼 달콤하고 향기롭진 않았다....
약간의 실망을 안은 채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동료들에게는 신비복숭아를 아냐며 짐짓 알은체를 해대며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럼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약간의 아쉬움.
다시 챗GPT의 힘을 빌렸다.
오.. 역시...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청개구리가 되어 과일가게 사장님의 조언을 뒤로해봐야겠다. 복켓팅을 할 만큼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지 꼭 확인해 볼 마음으로 오늘도 부서장님보다 먼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