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사랑한 것이 아직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

스누피가든에서 만난 내 안의 어린아이에 대하여

by 감격발전소

어릴 적 사랑했던 것들은, 생각보다 오래 나를 붙잡고 산다. 나에게는 스누피가 그랬다.


말수가 적고, 늘 느긋하고, 가끔은 지붕 위에 올라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강아지.

스누피의 그런 세계관을 깊이 이해해서라기보다는 그저 하얗고, 뽀얗고, 귀여운 그 아이가 좋았다.


어린 시절 꽤 고가였던 대형 스누피 인형이 너무나 갖고싶어 엄마에게 매일같이 사달라고 졸랐고, 결국 이모가 인형을 사주셨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니 뭔 이상했다. 스누피 특유의 사랑스런 입매와 눈 웃음이 미묘하게 달랐다. 그렇게 원하던 스누피 인형을 받고도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참고로 나의 아들은 '레고'를 아주 사랑한다. 이 녀석 역시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데, 그래서 나는 품번을 알아본 뒤 중국 모방품을 사주곤 했다. 처음엔 신제품 레고를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열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아들은 입을 삐쭉 내밀기 시작했다.


"중국산 레고의 아이언맨은 눈빛 자체가 정품과는 달라."


그 말을 듣고 나는 크게 웃음이 터졌고, 친정 식구들과 아이의 까다로운 취향을 공유하며 피식 웃음을 나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보니 문득 깨달았다. 나 또한 어린 시절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하핫.




아무튼, 그 시절의 나는 아들의 레고 사랑만큼이나 스누피에 꽤나 진심이었다.


작년 연말, 제주 여행을 계획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도 스누피가든을 안 가봤다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돼.


그럴듯한 이유였다. 아이들을 앞세운, 그럴듯한 명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곳에 다시 가고 싶었다. 어릴 적 사랑했던 캐릭터가 완전히 녹아 있는 공간에

어른이 된 내가 한 번 더 들어가 보고 싶었다.




스누피가든에 들어서자 내 안의 시간이 천천히 풀어졌다.


찰리 브라운이 나무에 머리를 콩 들이받고 있는 장면 앞에서는 나도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패티와 마시가 상념에 잠긴 듯한 조형물 앞에서는 기어이 그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즐거운 일을 상상하듯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이의 보호자인 내가 아니라, 그저 어릴 적 나였다.




그날 우리는 무려 네 시간이나 그곳에 머물렀다. 머무른 시간 내내 스누피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는 기분이었고, 그 벅참에 내가 자꾸 멈춰 섰기 때문이다.


곳곳에 적힌 스누피의 문장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 했다.


고개를 들고 계속 위를 바라봐.
그게 인생의 비밀이야.


행복이란,
따듯한 강아지 한 마리야.


어제에게서 배우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보되,
오늘 오후엔 좀 쉬어.



유년의 힘은 크다. 그 시절에 사랑했던 무언가의 힘은 더 크다. 어른이 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지만, 어릴 적 좋아했던 것들 앞에서는 잠시나마 자신을 회복한다.


웃음이 멈추지 않는 그런 기분, 느껴본 적 있어?


그날의 나는 그 질문에 아주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이의 엄마이기보다, 한때 스누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 오래 머물렀던 날. 내 안의 어린 아이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걸 느꼈다. 그 아이가 여전히 웃을 수 있어서, 그 아이가 아직 따뜻한 강아지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Keep looking up… that’s the secret of life.

고개를 들고 계속 위를 바라봐. 그게 인생의 비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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