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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콩밭에 Mar 27. 2024

(독서)아빠의 아빠가 됐다

조기현

병원에서 여러 간병 콘텐츠들을 봤는데 '청년 간병' 주제로 썸네일이 많아 작가를 알게됐다. 


유려하고 진진한 문장에 압도됐다. 서정성과 사회성을 좁히는것이 예술가의 일이라면, 숨쉬고 발딛는 내 현실의 사회성을 재료로 서정성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 게 작가의 일이고, 그래서 작가는 현실에 최앞단에 있어야 하는 존재 같다. 이 책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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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효용

1포 10kg 100개의 생애. 


나는 아버지의 시든 발목, 혈관 깊숙이 빨대를 꽂아, 공들여 시를 뽑아먹었다. 시를 뽑아먹을수록 나는 통통해지고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툭툭, 부러졌다. 그게 마음이 아프다. 박연준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이 세상 모든 일이 돈 아니면 안됐다. 공장은 나를 짓밟지 못해 안달이었고 병원은 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공장과 병원 사이에서 동아줄처럼 진보 정당을 잡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이 나를 더 하찮게 만들었다. 아주 미세하게 느끼고 있던 권리 감각이 내게 먼지 한톨 만큼의 존엄도 없는지 확인해주는 일들 앞에서 더 처참하게 뭉개졌다. 


죽음 앞에서 종결된 정서가 나를 평생 지배할 수도 있다. 


김정환 시인은 시의 의무고 서정성과 사회성을 좁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아프고 죽는 삶에서 돌봄은 정상적인 과정이다. 


돌봄이란 형벌을 받은 듯했다. 개인 시간이 없어지고 금전 부담이 커지고 무엇보다 아빠의 돌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시민 관계 증명서는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과 인지 장애증 환자이기 이전에 한 사회의 성원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내 돌봄이 비가시적인 소모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갖는 행위라고 인정한다. 아버지와 내 관계가 부모와 자식일 뿐 아니라 유동적이고 다양하게 연결되는 사회적 관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연을 말해달라는 말을 들으니 긴급 복지 지원과 기초 생활 수급자 신청 앞에서 간절하던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몇몇 서류로 증명되지 않는 사실을 사연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어쩌면 합리적인데도 내키지 않았다. 나를 사연이라는 온정적인 틀 안에 끼워맞춰야 하기 대문이었다. 불쌍한 존재가 돼야 하고 불쌍한데 착해야 하고 그래서 지원이 더 의미가 있어야 한다. 내 삶 전체를 가난으로 설명하고 그 삶을 심사받아야 한다. 차라리 서류 뒤에 숨어서 가난을 증명하는 쪽이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절차들 속에서 헤매는 모욕은 당연히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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