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오르한 파묵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읽어봐야지.
소설과, 그림, 그림과 소설에 대한 설명이 가장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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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이미지(그림)
독자는 소설 속 단어들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어떤 풍경화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을 쓸 때 나의 내면에서 가장 처음 고개를 드는 강한 충동은 내가 알고 있는 일련의 소재들을 단어를 통해 '보는' 것입니다. 한번도 말로 표현된 적 없는 삶의 어떤 지대를 탐색해 나와 같은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이 겪는 상황, 색각, 느낌을 처음으로 단어로 옮기는 것입니다. 먼저 내 머릿 속에는 사람, 사물, 이야기, 이미지, 상황, 신념, 역사가 있습니다. 짜임이 있습니다. 극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고 심화시키고 싶은 상황도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단어에서 그림으로 전환해야 하는 수천수만 개의 작은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소설 읽기를 그림 보기보다 더 참여적이며 사적인 일로 만듭니다. 우리의 상상으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그리면서 숲을 지나가야 합니다. 소설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나는 어떤 세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독자들 역시 그곳으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창조적 충동은 시각적인 것들을 단어들로 표현하려는 의욕과 열정에 의해 더욱 활기를 띱니다. 개인적, 정치적, 도덕적 충동 또한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박물관 같은 특성이 있는 소설들은 생각을 일깨우기보다는 간직하고 보존하며 잊히는 것에 저항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모두 함께 공유하는 어떤 삶을 기록하는 역사가인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바로 내가 본 것들을 보고 느낀 것들을 느꼈군요. "
소설에서 보고 희열을 느꼈던 허구 세계까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느낍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독자들은 역사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연약함, 세상의 광대무변함, 세상 속 우리의 위치에 관해 생각하게 됩니다.
비서구권에서 소설은 드러내 놓고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됐습니다.
소설가의 인생 경험과 상상력은 그에게 풍부한 '재료'를 제공해 줍니다. 소설가는 이 재료를 탐색하고 발전시켜 깊숙이 아우르기 위해 글을 씁니다.
중심부
중심부의 위치가 너무 명확하고 빛이 너무 강하면, 소설의 의미가 곧장 드러나 버려 읽기가 지루해집니다. 나에게 소설의 중심부는 어떤 소설이 종국에 우리에게 삶에 대해 가르쳐 주고, 느끼게 해주고 암시해주고, 보여주고, 경험하게 한 심오한 어떤 것입니다. 삶이 그러하듯 순문학 소설 역시 쉽게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다른 것으로 쉽게 환원될 수 없음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중심부를 필요로 하는 욕구가 중심부의 힘과 지배적인 논리에 맞서고 싶은 충동과 서로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명확함과 모호함, 통제와 해석의 자유, 혼합과 파편 사이에 특별한 균형을 도모하는 순문학 소설만이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진정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니체/ 인간은 예술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예술 작품을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
나는 최근 10년 동안 인생에서 마주친 사물과 삶과 세계에 대해,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표현하기 위해 소설을 써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