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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콩밭에 Apr 07. 2024

(독서)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장강명 작가의 글들이 유익하면서 실용적인 건, 한국 저자 중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솔직하고 현실적인 얘기들을 거침없이 하기 때문인데,반대로 이 저자의 창작물을 불편한 마음도 항상 따라온다. 


공동체가 느끼는 고통, 불안, 불평등, 부조리, 불합리에 대해서 선명하게 비판하고 뾰족하게 정밀타격하긴 하지만, 과연 저자는 그런 동시대인의 쓰라림과 괴로움을 심적으로 추체험이라도 한적이 있을까. 오히려 한 발짝 멀리 떨어져 공동체의 고통을 타자화하면서 소재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지적으로만' 소비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지점이 있다. 작가적 명성에 대한 여과없는 욕망을 드러냄, 너무 잘난 코스만 밟으며 살아옴, 문체에서 드러나는 보수적 성향, 지망생으로서 느끼는 질투-시기심 뭐 이런 것들이 아니꼽게 느껴져서 그런건지 뭔지. 잘 모르겠음. 


이런 맴은 이 저자가 뛰어난 예술가라기보다는 뛰어난 저널리스트, 논픽션 작가로 더 다가오는 게 커서기도 한 것 같다. 극강의 T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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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먼저 그럴듯한 허구가 되어야 한다. '그럴싸함'이라는 요소는 중요하다. 거짓말을 잘하려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정성스러운 거짓말이 되어야 한다. 소설에서 진실을 존중하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가 사실성, 개연성, 핍진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실성은 강력한 실감과 몰입감, 설득력을 주고, 독자가 현실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하고 비용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다. 강퍅한 독자가 책장을 넘기자 말도 안된다며 콧방귀를 뀔까봐서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직업 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 전문화되어서 리얼리즘 소설 쓰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생각도 한다. 문학의 힘이 약해진데에는 그러한 요한도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현실 세계의 깊은 구석을 잘 살피지 못하게 되면서 전문 직업인 필자들의 에세이가 주목받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부의 원천은 예나 지금이나 창작자의 뇌다. 한국 드라마의 장르와 소재 폭이 넓어지면서 프로듀서들이 기존 작가군에서 외부 스토리텔러로 눈을 돌리게 됐다. 영화와 드라마 제작자 및 연출자도 다들 똑똑하고 그들의 세계도 깊고 넓다. 어떤 소설이 영상화하기 좋은지, 영화계 인사들이 어떤 포인트에 끌리는지를 글 쓰는 사람은 알기 어렵다. 특이한 설정 하나 때문에 판권을 사들이기도 하고, 그냥 분쟁을 피하기 위해 그러기도 한다. 소설 집필이 점점 '원천 콘텐츠 창작 활동'으로 변해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정보들을 고르고 이어붙여서 맥락을 일으킨다. 상징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세운다. 이것은 세계의 본 모습과 상관없는 가공의 질서다. 재료와 도구가 허용하는 안에서 내 마음대로 의미를 명한다. 그렇게 의미의 집을 지은 뒤 거기에 불안한 정신을 누이는 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다. 


이게 다 자본주의와 세계화 탓이라고 결론 짓는다면 저는 이 역시 안이한 타협이며 지적 태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하고 흐릿한 적을 거대하고 흐릿한 상태로 놔두는 일입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에 들어가서 마구잡이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고 훌륭한 전쟁 보도사진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유능한 종군기자라면 전쟁에 대해서도, 자기 카메라에 대해서도, 때로는 전쟁 보도사진이 매체에 실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겁니다. 


인간은 부정신호를 긍정신호보다 더 크게 받아들이며, 비판을 극복하는데에 대략 네 배의 칭찬이 필요하다고 한다. 


작은 식당은 직원 월급 체불해도 되는가? 작은 공장에서는 사람 다쳐도 되나? 크기와 관계 없이 지켜야 할 최소한이 있다. 우리는 그걸 기본이라고 부른다. 


소설이야말로 사유와 사변을 담는 예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2020년대 한국 소설가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인지도 시장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작업을 하는 내내 '이걸 왜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유가, 의미가 있어야 한다. 


창작자에게 표절이라는 낙인은 그냥 끝장이다. 다음이고 뭐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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