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태양계는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명왕성으로 총 9가지다. 언젠가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제외된다는 얘길 들었을 때, 놀랐기보다 슬펐다. 과학적인 이유보다 가장 작은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가장 먼 행성이 제일 먼저 배제된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리고 나만이 명왕성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 같아서. 어쩌면 명왕성은 아주 조그맣고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이따끔 아주 사무치게 마음을 파고드는 무언가가 아닐까?
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항상 모든 것을 안다고 자신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그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고 그를 매일 팽창하는 우주로 비유하곤 한다. 그렇게 연인이 되는 것은 나의 우주와 그의 우주가 만나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다고. 나는 우리의 세계가 세상 중심에서 멀어져 저 멀리 우리 둘만 남게 된다고 해도 괜찮았던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는 서로에게 단단하고 다정하고 가장 안전하고 재미있었으니까. 함께 그리는 미래가 영원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나의 '명왕성'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가까웠지만 가장 멀어진 우리 사이. 점점 무뎌지고 내 마음 속 저편에 묻어두었다가 어느날 불현듯 나타나는 잔상 같은 존재. 평상시에 잘 지내다가 어떤 계절에, 어떤 노래에, 어떤 물건에 갑작스럽게 그의 존재가 튀어나오면 종종 그에게, 과거의 나에게 안부를 묻곤 한다.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어
우리가 같이 듣던 노래, 같이 자주 갔던 장소, 나눴던 대화, 우리가 함께 그려간 미래, 이젠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한참 들여보았다가 당시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마음들이 지금에야 이해가 되기도 하고, 여전히 물음을 잔뜩 안고 헤매기도 한다. 물수제비처럼 던진 질문들은 동동 떠다녀 내 마음 여기저기 어딘가 헤집다가 결국 흘려보내고야 만다.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 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늠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그에 대한 마음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면 나의 명왕성에 대한 감상이 달라진다. 그땐 우리의 세계가 가장 크고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세계에서 나와보니 내가 실재하는 이 세계가 더 크다는 것.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만큼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세계가 때때로 즐겁고 때때로 지루하고 매정하면서도 다정하다는 것. 그리고 수없이 그에게 안부를 보내면서도 내가 그에 대해 얼마큼 알고 있었는가 의문이 든다. 과거의 그, 정리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그와 점점 내가 앞으로 알지 못할 그지만 결국 모두가 같은 사람이면서 모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간다.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메일들이 밀려와
&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또한 나는 알고 있다. 그에게 콜라병이 담긴 음성메일을 보내는 것처럼 그도 나처럼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제멋대로인 공전주기에, 그 공전주기가 다른 행성에도 미쳐 행성에서 왜소행성으로 분류되어버린 명왕성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그렇게 어떤식으로든 닿는 마음이 있다고 믿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명왕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