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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시환 Oct 04. 2021

나희덕, <오 분 간>

자연스러움에 관하여

자연스러움에 관하여



올해 상반기에 읽은 책들을 정리해보았다. 소설을 자주 읽는 내가 올해는 에세이를 가장 많이 읽었고 그중에서도 주로 '결혼'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내가 연애와 결혼이라는 주제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게다가, 올해는 유독 친척부터 조금 먼 친구까지 결혼 예정 소식이 많이 들려서 내가 결혼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지만, 결혼을 생각할 나이에 성큼 다가왔다. 그래서 요즘 가장 고민인 서로 함께하게 된 계기를 가장 가까운 친구와 닮고 싶은 가정을 꾸린 분께 물어봤다. 두 사람의 답은 '자연스러움'이었다. 물론 함께 해온 시간 속에서 확신과 믿음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코드가 잘 맞았고 물 흘러가듯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었다고.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 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희덕, <오 분 간>





화자가 아이를 기다리는 오 분 동안 화자의 일생이 지나갔듯 나도 오 분 간 나의 미래가 생생하게 스쳐 지나간 것을 기억한다. 5월 초, 어느 때와 다름없이 데이트를 한 날이었다. 햇빛은 카메라 렌즈에 비추는 것처럼 도처에 빛이 났고 연인과 손잡으며 걸었던 풍경이 천천히 지나갔다.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렸고 아파트 안에 설치된 조그만 분수대에서 솟아 나오는 물소리가 들리고 조금 강하게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보았다. 이 모든 풍경이 눈에 서서히 담겨오면서 연인의 옆얼굴을 보았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우리가 함께하는 삶을 그렸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산책로를 걷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웃고 떠들며 ‘우리’의 집으로 향하는 하루를 기대했다. 집에 돌아오면 내가 연인을 기다리거나 연인이 나를 기다리는 삶을, 주말엔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늦은 점심을 먹고 소파에 서로 부둥켜 껴앉고 넷플릭스를 보는 삶을, 자기 전에는 각자 읽은 책에서 좋아하는 구절을 읊어주거나 재미있는 영상을 같이 보며 잠드는 삶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결혼이라는 무게를 피하고 싶던 내가 처음으로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내가 읽은 책에서 서술했듯 '우리'만의 카테고리가 분류되었다. 우리만의 세계에서 우리끼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우리만 아는 이야기가 생기면서 데이트를 하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한시라도 더 가까이 함께 하고 싶었다. 조금 더 놀다가 가고 싶어 하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 바로 연인을 보러 가는 것, 매일 한 끼 같이 먹는 밥이 제일 맛있는 게 일상이 되었을쯤 무렵, 그리고 언젠가 연인이 자전거를 타고 공원 한 바퀴를 돌아 내게 돌아왔던 날, 우리는 언제든 서로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다짐했을 때쯤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경험한 이 모든 자연스러움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가까운 친구는 연인이 연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 모든 자연스러움을 여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나는 삶이 너무 힘든 나머지 44살에도 그때와 같다면 삶을 마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나는 연인을 만나 44살보다 조금 더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을 바꿨고 우리가 70살까지 산다면 나의 남은 40여 년을 연인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연인은 알았을까. 온통 초록빛이었던 나뭇잎들은 점점 붉은색으로 물드는 계절이 왔고,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가만히 바람에 떨어지는 잎들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삶의 기다림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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