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영원히 영업을 계속할 거니까
어느 어린 날 "88만원 세대, 젊은날의 아픔"
삼정점이 폐점한다.
내가 점장으로 일했던 경기도의 한 작은 점포다.
신입사원 시절 첫 점포였던 신O점.
날마다 전쟁같던, 그 1등 점포에서 공산품 담당으로 일할 때
부문장은 자주 찾아왔고,
하필(=운 좋게) 뭐라도 일하고 있을 때 왔으며
날, 좋게 본다는 느낌을 자주 풍겼다.
그리고, 영업부문 임원이 좋게 봤다는 뜻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나는 고작 입사 8개월 만에 점장으로 발령받았고
맡게 된 점포는, 전점 매출 최하위에,
월 1,600만원씩 경상 적자를 내는 점포였다.
그 어느 것도 전례가 없어 말도 많았지만
개중에는 자랑스럽다며 잘해라 힘내라 해주는 동료들도 있었다.
전임 C점장은, 유능하고 인품도 좋은 이였으며
다섯 명 직원들도 그를 닮아서인지 훌륭했다.
그냥, 자리가 안 좋은 것 뿐이었다.
무분별한 점포수 확장이,
골목상권도 망치지만 회사도 망치는 사례였다.
아무튼 나는 일을 시작했고, 입사 초년생의 기세로,
또 신O점에서 이등병 때보다 더럽고 힘들게 익힌 판매 기술들로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고
만년 꼴찌였던 우리 매장은, 그 달에 탈꼴찌에 성공했다.
우리 밑에 다섯 점포나 깔았던 어떤 날은
이곳저곳에서 참 많이도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독" 이 되었다.
머지않아 장마가 찾아왔다.
매장이 좁아 장외에 상품을 벌려놓고 호객했던, 우리 같은 점포에는 직격탄이었다.
장마철을 처음 겪는 거라 대응할 방법도 잘 몰랐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을 빗속에서 비닐 치고 걷으며,
비에 젖은 상품 닦고 또 닦으며,
하나라도 더 판다고 마이크 잡고 악쓰던 내게 돌아온 건
두 달 전의 성과는 일찌감치 잊어버린,
이틀이 멀다하고 거듭되는 본사 간부들의 질책과 욕설이었다.
매출이 안 나오니 인건비라도 줄이겠다며
정규직 한 명을 다른 매장으로 발령낼 때,
그 때 나는 내가 억울한 줄도 몰랐다.
회사란 게 다 그런 건 줄만 알았다.
다만, 여기서 알바부터 일하다 정규직 된
그 덩치 큰 녀석, 가기 싫어 아쉬워하는 얼굴 보면서
그 때는 그게 내가 일을 못해서 보내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었다.
내 월급으로 가매출도 찍고,
잘 나가는 점장들한테 부탁해서 지원도 받고,
어떻게든 매출목표 맞추고, 경상 적자도 월 8백만원까지 줄였다.
그 흔한 "카드깡" 한번 친 적 없었다.
카드깡과 대량특판은 쉽게 매출을 올리지만
결국은, 회사의 미래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점장들이랑 종종 나누던 넋두리처럼
"그딴"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어느 영업이나 다 그렇겠지만
유통 또한 "매출이 인격" 이었고,
달성은 당연하고 못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한 사이클(=1년)을 다 겪어보고,
다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해가 바뀌었다.
설 연휴와 발렌타인데이가 연이어 다가온 해라
정초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불상사로 하나 있던 정규직 Y가 허리를 다쳐
6주간 입원해야 했다.
그 사실을 위에 보고했더니 나에게 말했다.
"혼자 해야겠네. 6주만 버텨 봐"
그건 점장이 휴무 없이 전 타임 근무하라는 뜻이었다.
우리 매장의 오픈은 8시, 마감은 23시였다.
계산대 직원 셋이랑, 알바하는 남학생 교대로 돌리며
하루 16시간씩 일하며, "버티기" 시작했다.
그 4주차엔 설이 있었고, 마지막 6주차는 발렌타인데이였다.
소나 말과 다를 바 없었던 시간이었지만
우리 매장 직원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못 쉰지 4주쯤 되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까대기" 를 치다가,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박스와 함께 매장 바닥에 나뒹굴었다.
들고 있던 게 술이나 병음료 박스가 아니라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런데 이러다가는 아무래도 크게 다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일요일에 그냥 무단결근을 하기로 했다.
본사에 있는 친한 동료가 하필 그 날 격려차 매장 방문했다.
그러자 우리 "여사님"들은 엉뚱하게 그에게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당신 어디서 나왔냐며, 점장님 왜 찾냐고.
딴매장에 물건(=상품) 빌리러 갔으니 찾지 말라고..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우리 직원들이 어떤 직원들인지 꼭 보여주고 싶었다.
빼빼로데이랑 발렌타인데이는 자신이 있었다.
신O점 때 이미 성과를 올린 경험이 있었다.
전년대비 100%신장, 그러니까 작년의 두 배 매출을 목표로 세웠다.
막연한 의지나 결의가 아니라
매출추세를 보든, 직원역량을 보든,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넉 달은 족히 팔 만큼의 초코렛을 발주하고,
판매계획을 세우고 진열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가나vs투유 라이벌대전이며 균일가 골라담기, 소단가 해체판매에
색색의 컬러페이싱(Color-Facing) 등
나도 여태껏 봤거나 해본 모든 기술을 총동원했지만
여사님, 아니 주부사원들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산더미처럼 들어오는 초코렛들을 일일이 맛보며 상품평하고,
이건 이렇게 모음진열하고, 이것들은 자체포장해서 팔아보자며
저 화곡동 복개천 상가까지 가서 포장재료를 싸게 사오기도 했다.
그리고 휴직한 Y 없이 우리는, 우리 목표였던
전년대비 두 배에서, 단 5% 모자란 95% 신장율을 기록했고
발렌타인데이 기간 내 매출 전점 252위를 찍었다.
평상시 매출이, 전점 최하위인 400위였으니 성과다.
(게다가 신장율로만으로는 전 점 1위였다)
그때만은 영업부문장도 참 감격해 했다.
Y가 있었으면 100%는 충분히 넘겼을 것이다.
그리 빛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행복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 회사는 바로
대형마트/SSM 의무휴무 도입에 따른 인력구조조정을 시행했고
나 역시 부문장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한 명을 내보내라는 지시였다.
항의를 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만둘 때가 왔다고 느꼈다.
천 번 양보해서 누군가 꼭 해야한다 쳐도 그걸 내가 하긴 싫었다.
지난 1년간, 그리고 그 6주간 동고동락해온 우리 직원들 중
회사를 떠나도 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더 이상 이런 개같지도 않은 지시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사직서를 출력해서 내용을 적고, 엄마한테 전화를 하고,
그때도 지금도 모 진보정당에서 일하는 선배한테 전화를 했다.
왜 하필 그 선배가 떠올랐는지,
또 전화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랑 통화할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선배와 통화를 마쳤더니 있는지도 몰랐던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참 비정하게도 맑고 파랗던 그날의 봄 하늘을 바라보며
선 채로 꺼이 꺼이 울었다.
그리고는 사무실로 돌아가 사직서를 찢어 버렸다.
그러던 상황에서 직원들에게 은혜를 입었다.
근무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씩으로 줄이면 어떻겠냐며
D여사님이 먼저 의견을 제시했고,
모두 별 이의없이 동의했다.
8시간 파트타이머 4명 -> 6시간 파트타이머 4명
이렇게 1명분의 인건비가 절감된다.
다만 급여도 100만원에서 78만원으로 줄어든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을 난 찾아낼 수 없었고,
비겁하게도 회사에 맞서 싸우지도 못했다.
여사님들은 점심 안 먹고 세 시간 일찍 퇴근하니 좋다고 했지만
나는 그분들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달, 나는 본사 발령을 받고 매장을 떠났다.
그토록 지긋지긋했고, 끔찍하게 싫었던 것들 투성이였는데
문 닫고 걸어가다가 불 꺼진 우리 매장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며 들었던 감정은
나 그 매장 일, 그렇게 괴로웠는데도 좋아했었구나.
싫어하면서 좋아했었구나.
계산대에서만 12년 일해도 최저임금 받는 우리 최고참,
S여사님은 지금도 다닌다.
12년 새 가장 힘들다며,
전화할 때마다 못 듣던 한숨도 쉬신다.
학원강사 하시다 장사꾼이 된,
권유판매의 달인 우리 D여사님도 지금도 다닌다.
남 밑에서 일한 시간이 많지 않아
새로 온 점장이랑은 도무지 맞지가 않는다고 한다.
특전사 출신 우리회사 최연소 정규직 중 하나인 Y,
녀석은 지금 다른 매장에서 일한다.
집안 사정이 복잡한 애라 마음 고생도 많았지만
다니는 한 몸 건강히 잘 다니길 빈다.
아, 그리고 공장 다니다 온 스물다섯살 캐셔 M.
게임 참 좋아했던 M.
술처먹고 시비를 걸다가 욕설을 퍼붓는 취객과
처음으로 소리높여 싸우다
내 앞에서 서럽게 목놓아 울던 우리 M은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
새로 온 점장이 결국 한 명을 내보냈고,
제일 어린 M이 그 대상이 되었다.
억울하다며 하소연도 들었고,
좋은 일자리 있으면 알아봐준다고도 했는데
내 삶에 쫓겨 그 어느 약속도 지켜주지 못했다.
여러모로 나는 참으로 나 밖에 모르는 점장이었다.
나중에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산다면, 자식 손 붙잡고 와서
여기가 아빠가 젊었을 때 일했던 곳이라고
소개도 시켜주고, 장도 보고 하는 모습을 꿈꾼 적도 있었다.
이제는 이루지 못할 꿈이지만,
내 서른한살~서른두살의 오픈부터, 마감까지 다 가져갔던 우리 매장을
이제는 사진으로만 다시 볼 수 있겠고
내가 그 곳에 있었던 흔적도 사라지겠지만, 상관없다.
내 마음 속의 삼정점은
내가 앞으로도 계속 찾아다닐 사업장들
비정규직이 서럽게 차별받고
어린 노동자가 힘들고 억울해 눈물을 흘리는 모든 회사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영업을 계속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