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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l 31. 2018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 에 관하여.

해당 소설의 이미지 전달 방법과 예술의 역할에 관하여.

  

  

1. 

▲클로드 모네, 1904, 《런던, 안갯속에 비치는 햇살 아래 의회당》


어떠한 예술 작품은 왜 우리에게 신비로운 감정을 주는 것일까? 

때때로 우리는 어떠한 작품을 보면서 캔버스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의 내면세계를 비추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떤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무엇인가를 가지는 듯한 느낌은 실로 오묘하며 이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던 희로애락의 감정을 끄집어 올린다. 

이러한 방식은 미술가에 의해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표현 방식에 따라서는 같은 묘사 대상도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그래서 위의 질문은 달리 말하면 대상을 신비롭게 묘사하는 방법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다시 질문해보자. 어떠한 미술 작품을 신비롭게 묘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대상의 물질적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량감이나 단단함, 물질적인 밀도를 제거하고 그 자체도 색채 현상이나 분위기 효과의 표현에 지나지 않게 만들 때 작품 전체의 분위기나 색채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은 증가한다. 인상주의적 묘사 방법에 가까운 이 방식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예술 사조이기도 하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회화에 신비로움을 주려는 방법으로 활용됐다.

이러한 신비로움을 우리는 미술 작품뿐 아니라 소설에서 접하기도 한다. 어떤 미술가가 색채와 분위기 효과를 위한 붓 터치로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인상을 줄 때, 어떤 소설가 역시 그의 손으로 화폭이 주는 색채와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작품 안에서 어떠한 감각적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예술가는 대체로 하나의 화폭에 하나의 인상적인 순간을 압축적으로 전달하고자 노력하며 소설가는 인상적인 순간을 서사 형식을 빌려 연속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2.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中 시간의 점에 관한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예술가에게 인상적인 순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이는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통한 관찰로부터 비롯된다. 내적, 외적으로 끊임없이 관찰하고 탐구하면서 그들은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순간의 포착은 단순히 미술가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시인의 발견도 이러한 순간의 포착이며 심지어 이성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는 과학자 역시 그 순간의 포착을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그들은 이것을 의미 있는 순간의 발견이라 불렀다. 

의미 있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며 어떠한 감수성에 자극을 받는 순간에 의도치 않게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가령, 이것은 웅장한 자연물을 보았을 때 눈을 떼지 못하는 순간, 어떤 작품 앞에 서서 까닭 모를 눈물을 흘리는 순간, 힐끗 본 누군가의 모습과 행위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은 이것을 그의 책 《여행의 기술》에서 『시간의 점』이라고 불렀다. 『시간의 점』이든 『의미심장한 순간』이든 그러한 순간은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위에서도 떠내려가지 않는 부표처럼 항상 그 자리에 서서, 강 건너편에 있는 우리의 신경을 계속 건든다.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그러한 시간의 점을 실제로 표현하느냐, 그저 마음속에만 그리느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한 이들의 다양한 작품은 우리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예술 작품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얻은 시간의 점과 결합하여 어떠한 감정을 선동한다. 그래서 예술은 내면의 다채로운 경험과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의 점이 많을수록 우리를 더욱 고양한다. 

  

  

3.

  

제가 읽는 책들은 제가 어릴 때 알고 좋아했던 것뿐입니다. 옛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저도 이 책들에게 돌아가지요. 구약성경, 디킨스, 콘래드, 세르반데스.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매년 읽는 것처럼 저는 『돈키호테』를 매년 읽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너무 자주 읽어서 첫 쪽부터 읽기 시작해서 끝까지 읽지 않습니다. 친구를 만나서 잠깐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는 한 장면이나 한 인물에 집중해서 읽습니다. 《파리 리뷰 인터뷰 : 작가란 무엇인가, 윌리엄 포크너와의 대화 中》

  

이러한 예술 작품, 그중에서 인상주의 회화를 이야기할 때마다 생각나는 단편 소설이 하나 있다. 바로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 Heart of Darkness》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자신은 성경처럼 매년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를 읽는다고 했다. 이 책을 두 번째 읽었을 때, 나 역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의 다른 훌륭한 책들은 연이 닿지 않아 아직 열어보지도 못했건만, 이 책에 대한 확신은 점점 더 깊어갔다. 그리고 신성한 의무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훌륭한 작품은 처음에는 못 알아봐도 시간이 지날수록 골동품처럼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이 그러했다. 지식과 경험이 쌓일수록, 그리고 이 책을 읽을 시점에 내 옆에 있는 어떤 책이 있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생각을 선물했다. 프로이트와 칼 융의 책을 보는 해에는 이 책은 내면을 비추는 책이었고 서양 미술사와 관련된 책을 보고 있을 때면 한 화가의 회화적 표현 기법을 다루는 책이 되었다. 특히 뿌연 안개가 낀 듯한 음침한 정글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표현 기법은 평생을 함께해야 할 책이라는 신성한 의무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올해에는 정글의 이미지가 커츠라는 인물과 독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하여 눈길이 갔다. 

  

  

4.

  

“오늘날 ‘캐릭터’라는 단어는 문학 속의 인물뿐만 아니라 기호나 문자 혹은 상징을 뜻하기도 합니다. 캐릭터라는 단어의 의미가 한 개인의 독특한 특징에서 개인 그 자체로 바뀐 것은 사회의 역사와 얽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현대 개인주의의 성장과 관련됩니다. 개인은 이제 그의 서명이나 독특한 성품처럼 그의 특이한 점에 의해 정의됩니다. 우리를 서로 구분해주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맥베스 부인을 그녀 본연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녀의 맹렬한 의지와 공격적 야심입니다. 그녀가 고통받고 웃고 슬퍼하고 재채기를 해서가 아니지요. 이런 것은 그녀가 다른 인간들과 공유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로 그녀 성격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보면, 다소 기이한 이 인간관은 인간 존재와 행위의 많은 부분, 어쩌면 대부분이 실로 그 사람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암시합니다. 그것은 그의 독특한 점이 아니니까요. 성격이나 개성은 비길 데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므로, 그것은 성격의 일부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테리 이글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How to Read Literature, Chapter 2. 인물 中》

  

  

정글의 이미지가 주는 영향에 앞서 커츠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그는 야만적 습속이 제거나 문명화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펼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만들어낸 왕국 안에서 자신의 소유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이중적인 인간이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나의 약혼자, 나의 상아, 나의 교역소, 나의 강, 나의 — .’ 라고 부르짖는 그의 말은 권력자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 말이기도 하다. 

그와 더불어 내게는 현실에 존재하던 박정희라는 권력자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훌륭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기억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망친 독재자로서 기억하고 있다. 나이를 먹은 우리는 선과 악을 분명하게 가르는 것이 동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며 현실에서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한 인간의 길고 긴 삶 가운데에는 이상을 위한 적도 있을 것이고 사리사욕을 취한 적도 있을 것이다. 특히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은 더욱 그렇다. 커츠 역시 그러한 현실의 권력자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를 통해 권력자의 이상이 약탈과 폭력이라는 실제 앞에서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현실과 이상에 대하여 고민하는 비범한 인간을 발견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와 권력자의 이상이 실제 앞에서 허구일 뿐이라는 것을 일제 강점기 시절 대동아 공영권을 통해 경험한 적이 있다. 그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북아의 번영과 평화,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이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이상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을 뿐이며 근대화라는 이름은 수탈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온 유럽이 기여한 커츠’라는 은유는 비단 그의 모친의 혈통이 영국계였고, 부친이 혈통이 프랑스계였음을 나타내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전 일본이 이바지한 대동아 공영권』의 다른 이름이다. 허울뿐인 이상은 침략과 수탈이라는 문명화된 인간의 폭력성과 야만성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5.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다.


죽음도 그보다 덜 쓸 테지만, 
거기서 찾았던 선(善)을 다루기 위해
거기서 보아 둔 다른 것들도 말하려 한다.


《단테, 신곡 지옥편 1곡 서막 中》


정글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조지프 콘래드가 묘사하는 정글의 이미지는 암흑이며,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와 죽음이 도사린 곳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자연의 보고로 등장하는 생명력이 넘치는 정글이 아닌 철저하게 미지의 대상이며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다. 저자는 그러한 신비롭고 음산한 느낌을 자아내고자 주인공은 대화체 속에 정글의 수많은 것들을 묘사하면서 부정적인 감정과 모호한 단어를 교묘하게 섞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화자의 시선은 이따금 우리가 유니세프 후원을 위한 TV 캠페인을 시청할 때 느끼는 시선과 비슷하다. 캠페인의 화면에는 더 많은 사람이 지갑을 열어 후원하도록 아프리카에 병에 걸려 죽어가거나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나 슬픔에 젖은 엄마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캠페인을 계속 시청하다 보면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이들이며 그곳은 슬픔이 가득한 땅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물론 그곳이 문명화된 사회보다 낙후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웃음이 있고 생기가 넘치는 곳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다큐멘터리나 여행 프로그램에서 간혹 본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는 까닭은 소위 잘 팔리기 위한, 다시 말하자면 후원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는 선원으로서 아프리카 지역을 다녀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곳의 현실이 비단 암흑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앞서 말한 캠페인의 감독이 아프리카 지역에 있으면서 다양한 현실 가운데 비참한 현실만을 추려 후원의 목적에 맞게 영상을 담아내듯, 그 역시 아프리카의 다양한 현실 가운데 어두운 분위기만을 뽑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묘사는 유니세프 캠페인을 보는 이들이 ‘불쌍한 아프리카인’이라는 관념을 가질 수 있듯이, 공포스러운 정글과 야만스러운 원주민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비판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가 제국주의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라기보다 그러한 묘사가 작품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정글을 표현한 까닭은 무엇일까?

흔히 공포 영화에서 언제 어디서 무언가 튀어나올지 모를 듯한 어두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총을 가진 자가 공포심에 이성적 판단을 없이 아무렇게나 쏴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정글의 이러한 묘사는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전달하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공포와 야만성을 발견하도록 긴장감을 준다. 말하자면, 정작 정글을 통해서 보는 것은 자신 내면의 어두운 심리이다. 

누구나 인간은 이상과 함께 욕망이 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이 이상을 앞세워 욕망을 실현한다. 침략, 전쟁, 착취, 폭력을 용인하는 가운데에는 번지르르한 이상이라는 빛 아래 탐욕이라는 어둠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어둠의 심연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믿고 싶지 않은 탐욕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믿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볼 때 우리는 공포감을 느낀다. 

  

  

6.

  

“세상사로 바쁜 손길을, 한 번의 호흡을 하는 순간이나마 멈추게 하고, 요원한 목적의 광경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로 하여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와 색채, 햇빛과 그림자의 비전을 잠시 보게 하는 것, 하던 일을 멈추고 한 번 보게 하며, 한숨을 한 번 쉬게 하고, 미소를 한 번 짓게 하는 것, 이것이 어렵고도 덧없는 예술의 목표인데, 이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성취할 수 있도록 예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자격이 있거나 운 좋은 사람들에 의해 이 목표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가 성취될 때 - 보십시오! - 삶의 모든 진실이 그곳에 나타납니다. 비전의 순간이, 한숨과 미소가 - 그리고 영원한 안식으로의 회귀가 말입니다.” 《조지프 콘래드 『나르서스호의 검둥이』 서문 中》

    

이러한 정글의 어둠과 커츠라는 인물의 내면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등불처럼 밝히고자 했던 이상과 어둠의 심연 속에서 발견한 탐욕성 사이에서 그는 분열증을 겪는다. 그는 욕망에 중독되면서도 끊임없이 고뇌하는 불쌍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그는 비범한 인간이기도 했다. 

화자인 말로는 “끔찍하다(The horror).” 라는 커츠의 나지막한 비명에서 그러한 비범성을 발견한다. 정신 이상과 현실을 오가는 한 인간이 끝내 미쳐버리는 것을 포기하고 죽기 전에 진실함을 담아 현실의 고통의 외쳤기 때문이다. 조금 더 쉽게 이해하자면, 거대한 기업의 부조리를 가까이에서 보면서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던 한 인간이 위험을 무릅쓰고 내부고발자가 될 때, 그를 보며 비범하다고 말할 수 있듯 그는 그러한 고발자가 된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와 비슷한 의미로 죽음 앞에서 커츠의 인간다움을 실현하려는 것이 비범하거나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광기 속에 파묻힌 인간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고뇌하는 인간임을 밝히는 저 비명이 주는 울림은 크다. 그의 마지막은 메멘토 모리이다. 

  

이상주의를 추구하지만, 그 자신은 이상주의자가 될 수 없는 커츠라는 한 인간은 비극 작가인 소포클래스 묘사하고자 한 "인간이 있어야 할 모습"이나 영웅의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와 같이 욕망에 굴복하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심연으로 다가갈수록 음산함을 더해가는 정글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투영한다. 정글은 인상주의 그림처럼 남아 모든 것들의 선명함을 빼앗는다. 말하자면 그 안의 인간은 인상주의 회화의 대상처럼 물질성이나 선명도는 사라지고 색채와 분위기 효과를 위한 요소로만 작용할 뿐이다. 마치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이 정글의 광기에 휩쓸리듯이.

우리 사회의 수많은 구조적으로 굳어진 통념 속에서, 부조리함을 발견하고 고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은 부조리에 눈을 감거나 무감각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부조리에 눈을 감고 거기에 편승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양심을 발견할 때, 인간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고뇌하는 인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 바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예술이 해야 할 역할도 바로 그곳에 있다. 그것은 바쁜 일상 가운데 자신을 잠시 멈춰 서게 만들고 표면에 드리워진 안개를 걷어 그 안에 담긴 본질과 문제를 밝히는 것이다.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생각을 자극하는 예술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고의 선물이다. 

  

끝으로, 《어둠의 심연》에서 발견한 것은 탐욕성 뿐만은 아니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수많은 죄악을 보고 난 뒤에, 그 밑바닥에서 발견한 것은 하나의 양심이었다. 끝내는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양심. 부끄럽다고 말할 수 있는 양심. 저항할 수 있는 양심. 그러한 양심이 혼령이 되어 세상을 떠돌 때, 민감한 자들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부르짖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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