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3)
차에 다시 타기 전에 카메라의 프레임을 이리저리 옮겨 태양의 위치를 조정해봤다. 가운데에 맞췄다가 왼쪽으로 치우쳐 찍어보았다. 태양 아래에 일렁이는 파도를 프레임 안쪽으로 들여봤다가 빼고 태양과 그러데이션 되는 하늘에만 초점을 맞춰보기도 했다. 프레임 속의 태양은 눈에 담은 태양과는 전혀 다른 태양이었다. 적막이 감도는 태양이었다. 사진을 찍었을 때 함께 찍힌 갈매기 한 마리가 사진의 외로움을 더했다.
다시 차를 타고 해안을 따라 위로 올랐다. 장호항을 향해 목적지를 찍었지만, 내비게이션은 구(舊) 해안 도로가 아니라 산길로 난 신(新) 31번, 7번 도로를 안내해주는 터라 옆에서 따로 지도 앱을 켰고 잘 보이지 않는 구(舊) 해안 도로를 확대하여 안내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쉼 없이 달리는 것은 목적지까지의 여행을 즐기게 하는 하나의 묘미였다. 어느새 우리는 어느 지점까지 최단 거리, 최소 시간으로 달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아름다운 경관을 옆에 끼고 천천히 보아가며 달리는 것이 목적이 된 것이다. 물론 목적지는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목적지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곳에 가기까지의 과정이었다. 그는 일부러 천천히 달리고 때로는 뒤의 차가 추월토록 양보해 가면서 차를 몰았다. 적어도 지금의 시간은 그 자체가 이 순간의 멋진 경관을 눈에 담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달성하려고 일부러 평소보다는 늦지만, 그러나 분명 제시간 안에는 도착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따금 지도를 잘못 봐서 길을 잘못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목적지를 알고 지도가 있으니 돌아 나오면 그만이었다. 목적지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몰랐다면 잠깐 우연히 잘못 길이 든 곳에서 내려 쉬다 가든지 혹은 아침의 고래불과는 다른 바다나 마을을 보았을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나는 이러한 기쁨을 알게 된 최초의 여정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학 시절의 국토 대장정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서부터이다. 여드레의 시간 중에 목적지까지의 자유여행이 두 번 주어졌다. 목적지까지 단시간에 오는 팀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었으나, 우리 팀은 그 혜택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느냐였다. 그래서 우리는 전날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즐기다가 들어가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계획에 따라 남들은 버스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도달하려던 그때, 해안을 따라 석양이 비치는 멋진 도로를 걸었고, 마을로 들어가 먹을 것을 얻어먹기도 했으며, 동네에 열리는 장터에 가서 제일 맛있는 것을 먹고 나오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그 지역의 유적을 답사하기도 했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여행을 마치고 한 친구는 내게 이러한 이야기를 했었다. 혼자 하는 여행만이 의미 있는 줄 알았는데, 함께 하는 여행도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무엇이 중요한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데에 따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그때 우리는 이 여행을 통해서 빨리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음을 알게 되었고, 비단 멋진 장면만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소한 것들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 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임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이 좋은 의미로는 남들과 다른 나만의 의미를 찾게 되고 나쁜 의미로는 뒤틀리게 된 것을. 굳이 나쁜 의미라고 쓴 까닭은 어떠한 다짐을 하였다고 해서 그 다짐과 의도대로만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어쩌면 나 역시 그런 처지에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따금 인생이 잘 안 풀릴 때면 차라리 남들과 같은 선택을 했더라면 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선택으로 인한 삶의 풍족함이 줄게 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한 번의 놀라운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보다 어렸던 그 시절의 특별한 여행이 나로서는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 새롭게 알게 된 세계로 인하여 나의 인식의 패러다임 영역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미 발을 담근 상태에서는 더는 과거로 역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사 억지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경험했던 그 새로운 세계를 계속 동경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처음의 시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탁월함을 얻기 위하여 꾸준히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한번 시도한 것은 한 번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모든 시도 중 어떠한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라고 여길 때가 있는데, 그 한 번이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거나 개인이나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이 상당히 큰 것들을 말한다. 개인이나 사회의 사고관 자체를 바꿔버릴 만한 것일 때 그렇다. 그때의 여행이 그러했다.
인생을 흔히 여행에 비유하게 될 때, 여행에서 이렇게 의미를 발견하려는 나의 노력은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것은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다시 정립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이렇듯 서로 조금의 관계라도 있는 것을 같은 범주로 가둬버린다. 그리하여 여행의 의미는 인생의 의미와 같은 영역에 속한 것이 되어버리게 된다. 여행뿐만 아니다. 좀 전에 바라본, 수면을 뚫고 올라온 이글거리는 태양이 내 작은 입으로 불어도 생명이 있는 것처럼 다시 벌겋게 살아나는 할머니네 집 아궁이 안에 붙어 있는 숯불과 같아진 것도, 그전까지 검었고 이후에는 푸르게 변할 저 하늘을 붉게 만든 지금의 상황이 내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한참을 걸었던 오후의 그 먼 길과도 같아진 것도 바로 그 붉은 태양이라는 단어를 추상화하고 범주화하여 재판(再版)을 거듭하고 있는 내 '기억 사전'의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국토 대장정을 가지 않았더라면 알 수 있었을까? 그때 나와 뜻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의미 있는 경험들을 해보자고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바뀌지 않았을까? 인생은 B와 D 사이의 C, Choice이라고 말했던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 떠오른다. 이것은 우연적인 선택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그 선택의 기회는 우연히 왔겠지만, 그 선택을 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내 마음속에 어떠한 기준들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믿는 까닭에 우연의 기회에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에 '그래야만 한다.'라고 어떤 때는 당연하게, 또 이따금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개인의 선택을 짓누르는 도덕관념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도, 교육이라는 세뇌의 다른 이름으로 그렇게 된 것도, 혹은 내 가치관과 의지가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선택한 것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인생의 모든 중요한 선택은 내면의 자아가 그렇게 선택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겪는다고 믿는다. 신에게 어떤 사명을 부여받은 인간만이 그것을 결코 피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내적인 자아가 요구하는 사명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는 유일한 선택은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유부단한 인간만이 선택의 강요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 자신을 고립시키는 결과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우유부단함 속에 있다가도 선택의 강요에 못 이겨 결국 합리적인 판단을 버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최악의 선택을 하고야 만다.
삶은 게임처럼 저장을 할 수 있고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어떤 선택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되고야 만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려 찾은 선택의 스위치를 눌러 버리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선택을 연달아서 하게 되면 결국 그는 자신의 선택을 저주하며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인간이 된다. 방황하여 찾으려는 생각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의미 있는 여행을 해보자는 선택이 내 가치관의 한 기준으로 자리 잡아 사소한 판단 하나에도 영향을 미칠 때, 비로소 나는 한 알의 모래와 같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도 중요한 가치들을 발견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선택의 순간에서도 중요한 기준이 되어 우유부단함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물론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마냥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제일 힘든 선택은 둘 다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여길 때이다. 의미 있는 선택이라는 추상적인 말이 서로 다른 두 의미 있는 것들로 분화가 될 때이다. 극단적이긴 하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나오는 여러 선택,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나오는 선택이 그러하다. 이것도 가치 있고 저것도 가치 있는 선택이라고 여길 때, 더욱 세분화한 판단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침묵'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복음을 전파하려고 일본에까지 와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으려 할 때, 그리고 자신이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 기독교를 믿는 일본인들을 눈앞에서 고문하고 죽인다고 할 때, 의미 있는 선택이라는 판단의 기준에 더해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판단의 기준을 도입해야 하는 것이다. 비단 외국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 문화에서 일제에 항거하며 싸워간 의병들 사이에서도 충과 효 사이에서의 선택에 고민하던 예도 있다. 당시 의병을 이끌던 모 양반은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전쟁 중에도 효를 다해야 한다며, 짐을 싸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때문에 의병 세력은 와해되었다. 이는 유교 문화에서 중요하게 여긴 판단의 기준인 충과 효 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들과 인생에 한 번도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극단적 선택에 대해서 고민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한 고민이 실제 삶을 살면서 있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대비를 해줄뿐더러, 아마도 내가 여행 중에 결정했던 판단이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듯, 이러한 거대한 고민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서 있을 여러 판단에 중요한 가치 기준과 우선순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를 쓸데없는 생각이라 여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