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고 사온 고기와 반찬을 꺼내 식사를 했다. 예전에는 요란하게 크리스마스에나 쓰일 법한 긴 줄로 된 전등을 달아놓거나 프로젝터와 흰 족자를 가져와 영상을 보면서 식사를 하는 등의 제법 갖춰진 이벤트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어느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음식도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단순해졌는데, 그전 같았으면 김치찜이다, 돈가스 나베다, 스테이크다 해서 엄청나게 준비했을 것들도 다 사라지고 마트에서 사가지고 온 고기 한 덩이를 프라이팬으로 구운 뒤 가위로 잘라 먹었을 뿐이다. 나는 사실 그 모든 것보다 이게 좋았다. 단순하고 부담이 없으며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미니멀리스트도 아니지만, 음식에 돈을 과하게 쓰는 것만큼 아까운 게 없었을뿐더러 몸도 망가지게 하는 요인이었기에 선호하지 않았다. 돈이 없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게, 일단 먹는 것을 아끼게 된다. 먹을 것을 아끼면 자연스레 식단 조절이 된다. 더구나 헬스가 취미인 나로서는 그 비용 안에서 좋은 것을 찾아 먹으려고 하고 군것질을 하지 않게 된다. 검소한 삶이 돈이 없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지금 나는 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검소한 삶을 몸소 실천하는 셈이다.
이렇게 지내오고 있기에 이따금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보기에 과하게 음식을 주문할 때에는 속으로 내심 당황할 때도 있다. 물론 자신이 산다고 개의치 말라고 하더라도 이 또한 언젠가는 나 역시 대접해야 하는 빚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부담이 안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순간은 정말 즐겁게 먹는다고 하더라도 마음 한편에는 나는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상대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비싼 커피라도 사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공존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내가 지내는 삶이 안빈낙도가 아니라 궁핍과 가난이며,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비참한 삶이 아닌가 물어보게 된다. 한 번은 동생에게 떡볶이집에서 셋이 떡볶이를 먹는데 4만 원이 넘게 나왔다니까, 만약 맥주라도 한잔하고 사이드 메뉴까지 시켰다면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보고서, 내가 지나치게 먹을 것에 돈을 안 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하나는 대형 마트에서 10만 원 이상 되는 군것질거리를 사는 것을 보고 친구에게 놀랍다고 이야기하니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것인 양 말하는 것을 보고서 내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무언가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 그로 말미암은 타인과의 비교, 뒤이어 자신의 상대적 위치의 확인 속에서 불안을 느끼게 되는 그 과정은 소비 사회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다. 상품은 그 욕망을 부추기고 비교하는 것은 경쟁을 통해 사회의 경제를 이끈다. 불안감은 인간을 쉴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그러한 사회에 살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외면하고 있었다.
나의 이러한 상태를 한동안 '안빈낙도'라 여겨 즐기고 있다가 어느 한순간 무너지게 된 것은 내 앞으로 다가온 한 여인을 바로 이 소비 사회에서 나의 현재 상태를 알게 됨에 따라 강하게 붙잡지 못하게 되었을 때였다. 먼저 연락하고 먼저 말 걸어준 한 여인이 점점 마음에 갔음에도 마음을 끝내 열지 못했다. 그 까닭은 나의 소심함에도 있지만, 돈이라는 장애물이 눈에 걸렸기 때문이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함께 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고 재산이 필요한데, 내 주변을 돌아봤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남들이 돈을 버는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었건만, 내가 추구하는 길에서는 돈이 그다지 많이 필요치 않았고 내 인생의 설계에도 돈을 벌자는 게 들어가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누군가를 놓치지 않으려면 현실적으로는 돈이 필요했다. 내가 그녀를 붙잡지 못한 까닭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그러했다.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불안감, 그 불안감은 그녀를 놓아주는 게,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기억보다는 희미한 기억만을 심어주어 종국에는 망각도록 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만 들게 했다. 선명한 색깔을 주는 기억보다는 회색빛 기억을 주는 게 그들에게도 좋았다.
그뿐 아니라, 그때의 서러운 기억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도록 하기도 했다. 내 나이에 돈이 극도로 없다는 것은 운명처럼 올 인연에 물 한 모금을 주는 일도, ‘쉬다 가.’라는 말 한마디도 쉽게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자.'라는 다짐에는 '그럼에도 돈을 벌어야 한다.'라는 말이 붙는다. 가치 있는 일과 돈을 버는 일이 함께 병행되는 일을 찾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래의 비슷한 일을 겪지 않게 하도록 돈은 벌어둬야 했다.
혹자는 돈을 물물 교환의 척도가 아닌 자신의 구매력으로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 구매력의 규모를 어느 정도는 보유하고 있어야 미래의 불안정한 일들에 대해서 안심을 할 수 있고 안심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구매력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다른 가치에 비해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는 여러 능력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이 구매력 또한 한 인간의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될 것이다.
누구는 이를 두고 지레 겁을 먹는 거라고 할 수도 있다. 돈이야 벌면 되고 일단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다면 놓치지 않게 잡는 게 우선 아니겠느냐며 물을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갖지 말아야 할 핑계만을 찾고 상대방이 '그럼에도'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는 사악한 심보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진정 사랑한다면 노력을 해야 하는데 연애를 한 지 오래인지라 그런지 어딘가 껄끄럽고 익숙지 않다.
실로 사랑한다면 노력해야 한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상대와 마음의 거리를 조금 더 좁히고자 하는 현실적 노력이다. 현실 세계에서 마음의 거리를 좁히려면 표현과 몸짓, 눈빛으로 전달된다. 물론 이 행위 속에는 마음이 들어 있다. 마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행위들이다. 그 행위를 보고서 상대는 그 혹은 그녀와 연결된 마음의 끈을 조금 더 가까이한다. 상대와의 마음의 거리는 영원히 닿을 수는 없다. 다만, 사랑하면서 조금씩 좁아질 뿐이다. 절대적 거리로서가 아닌 상대적 비율로서. 그래서 초기에 사랑의 몸짓으로 말미암은 마음 간의 폭이 전체 길이의 50퍼센트만큼 줄어들어 눈에 띄게 가까워지는 거라면, 서로의 마음의 폭이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그 폭의 50퍼센트만큼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우리는 익숙함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사랑에 밀당이 필요하다는 말도 나오는 것 같다. 마음의 폭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서 좁아지는 폭을 보고 초기 시절의 사랑의 폭처럼 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 그러한 사소한 설계가 만족감을 높여주기도 한다. 여기서도 이처럼 행동 심리나 경제학에서나 말할 법한 선택 설계를 할 수 있고 실제로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결정을 내린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제논의 역설이 가능한 곳이 마음이며 어떤 이들은 영원히 눈앞에 잡을 수 없는 거북이를 보며 달리기를 중단해버린다. 조금 떨어져 보면 전보다 충분히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텐데, 오로지 거북이만 보이는 일인칭 시점의 시야에서는 가까워진 마음만큼이나 시야도 좁아진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마음이여!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어리석다. 사랑의 감정이 들어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니 상대의 마음이 거북이처럼 멀어진다고 해도 노력하지 않으니 결국 그 마음의 뒷모습을 보여 망연자실할 뿐이다.
결국, 마음을 좁히는 행위는 사랑이나 우정이나 마찬가진데, 둘의 차이는 내 마음의 방까지 상대를 들이느냐, 마음의 집 문 앞 초인종에서 멈추느냐일 것이다. 서로의 마음이 완전히 닿기를 바라며 그렇게 문을 열고 상대의 마음을 방으로 들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영원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가지려 하지 말고 그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이 공간 안에서 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닿을 수 없다고 손을 뻗고 소유하려 한들 불가능하며 설령 된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이거나 소유권이 없는 자의 비정상적인 소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소유적 사랑은 비극이나 비정상으로 나타난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일, 마음의 문을 열고 그녀의 마음의 집으로 달려가는 일은 마치 집에만 살던 히키코모리가 문을 열어 바깥세상에 한 발짝 내딛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연애는 사실상 모쏠에 가까운 수준인지라 더 그러한듯하다. 30대 이후로 연애를 전해 안 했으니 모쏠이나 진배없다. 더 서글픈 것은 누군가와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친구는 이런 나를 두고 "네가 연애를 하려 하지 않잖아."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연애를 동경한다. 마치 복권에 당첨되기를 속으로 바라면서도 복권은 사지 않고 공부를 잘하고 싶다면서 공부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면 결국 실패와 거절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속에 가려진 '이드'를 드러내 상대가 알기를 또한 두려워한다.
누구나가 다 그렇듯, 실패는 두려운 법이다. 그럼에도, 왜 어떤 이들은 실패하면서도 계속 도전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렇지 못할까?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모르기 때문에, 더 나아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잘 모르기 때문에.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지의 생물이나 외계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처럼 사랑을 한참 해봐야 할 제 나이 때 해보지 못한 경험이 실패를 두려워하게 한 것은 아닌가?
나 같은 사람에게 실패를 두려워 말고 도전해보라고 조언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로워도 이렇게 사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실로 행동을 교정해야 하는데, 반려견 행동 교정 전문가가 있듯 이러한 행동에도 교정을 해주는 전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만약 이러한 사람을 상대하는 행동 교정 전문가라면 어떻게 할까? 거절 받기 1회 시도하면 잘했다고 개 껌이라도 줘야 할까? 실로 연습이 필요한데, 현실에서 실패에 대한 연습, 혹은 고백에 대해 연습을 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실패에 대한 연습을 한 사람이 있기는 하다. 어느 한 유튜버는 '거절당하기 연습'이라는 채널을 통해 매일 하나의 거절 당하기를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 흥미로워 그의 책까지 읽어 보고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자신감이 들었지만,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러한 까닭이 어쩌면 내 안에 있는 슈퍼 에고 내지는 도덕관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니체는 도덕을 '개인에게 내재한 집단적 본능'이라고 했는데, 집단의 사고방식의 이상으로 집단, 타인의 눈치를 보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거절당하기 연습'을 한 그 유튜버의 행동 중 다수는 내가 보기에는 타인에게 폐가 되는 행동이거나 비난할 수도 있을만한 일들이었다. 그러한 행동 이후에 벌어진 타인의 눈초리, 비난, 험담이 있을 거라고 여기는 사고가 내 행동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게 두려워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는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나 역시 상대에게 고백한 이후에 웃음거리가 되는 게 두려워서 호감이 있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 필시 그러했다. 사실 웃음거리가 되면 또 어떻단 말인가? 나는 아직도 내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가? 혹시, 평판이 없어서 여기서 더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가?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까닭이 어쩌면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