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을 나오며

연재 소설 (11)

by Chris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은 거대한 어둠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지 않고 끊임없이 물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가는 대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소리는 동굴의 탄생보다도 먼저 태어난 소리였을지도 몰랐다. 혈관이 완성되고 그곳에 피가 돌게 되자 인간이 비로소 제 작동을 하게 되듯, 이곳에서도 중력의 법칙을 따라 아래로 흐르고 점차 막힌 곳을 뚫어 동굴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거대한 소리는 동굴의 생명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아무래도 어둠과 동굴은 조용해야 한다는 인상으로 인하여 마치 우리가 전등을 달고 빛을 이곳에 공급한 것과 같이 발 아래에서 나는 이 천둥과 같은 소리도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동굴 속에서 나는 이따금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나 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에서처럼 어떤 야만적인 일이 행해지거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마치 그런 일들만이 동굴에서 벌어질 법한 일일 거라며 행여 동굴 어딘가 버려져 있을지도 모르는 해골 뼈의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만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누구도 보지 않은 신비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동굴을 나오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리고는 남들처럼 동굴 앞에 걸린 인간이 지어준 이름 앞에서 V자를 지으며 날짜가 찍힌 사진 한 방을 찍고 나오게 된다. 그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을 관광 삼아 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동굴의 신비로움을 보기 위해서일까? 나는 이 동굴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한 때, 매달 서울의 궁궐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다른 목적을 가지는 전각들을 보면서 각 부분의 명칭이나 의미,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 건물들의 의미를 찾아서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가령, 건물과 관련한 책을 직접 들고 책에서 설명한 장소 앞에서 읽어보고 그가 느꼈던 것과 내 느낌을 비교하는 식이었다. 또 때로는 하나의 주제를 정해 살펴보기도 했는데, 궁궐 안에 수없이 많이 심어진 여러 나무를 찾아보고 그 까닭을 알아보는 식이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광경에 담긴 의미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무한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좋지만, 그 안에 나와 함께 생각을 나눈 다른 존재가 있으면 그와 함께 본 광경은 오로지 둘만 소유할 수 있는 정말 특별한 것이 된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해골이라도 발견하게 되길 바란 것은 어정쩡한 관광지가 아닌 나의 특별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게으름과 상상력 부족은 이 특별한 장소를 특성 없는 장소에 특성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뭐 그러면 또 어떠냐 싶기도 하고 뭐, 그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싶기야 하지만, 무언가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진이라도 찍을 때 점프라도 할 걸 그랬나?' 휴대폰으로 찍은 어색한 사진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 둘이 와서 그런지 작년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에는 우리 둘, 그리고 친구의 여자 후배, 그리고 그 후배의 친구까지 4명이 이곳을 방문했었다. 그때도 별반 다를 바 없는 동굴 구경이었지만, 적어도 사진에서만큼은 발랄함이 느껴졌다. 사실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인간이 만들거나 혹은 자연이 만든 어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나 혹은 어떤 재미있는 활동을 하는 것도 묘미이겠지만, 누군가와 함께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서 대화하거나 그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힌 묘미를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긴 여행의 일정을 살펴본다면 대체로 이동이 대부분이고 감상이나 활동은 그에 비하면 적다. 그런데도 감상이나 활동의 영역에만 여행으로 생각하고 그곳까지 가는 이동의 일정은 그저 다음 여행지를 위한 수고스러움일 뿐이다. 그 여행에 이동마저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이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수단이 아니라 여행의 목적으로서 의미를 발견하려 노력이라도 해보지 않겠는가? 여하튼, 동굴의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 속에 작년, 혹은 재작년에 있었던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은 어떤 상실감마저 주었고 이동 중에도 그 감정이 한동안 계속됐다.

동굴을 나와 지상으로 향하는 모노레일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동굴 주변에 머물러 있던 옅은 안개와 습기도 모노레일 안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모노레일이 이동하는 방향에는 내가 살아온 세상이 있었고 그곳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그 멍한 기분이 싫어져 대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를 보아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다시 아래를 바라보았다.

지상으로 내려와 그의 차를 타고 숙소를 돌아가는 중에서도 우리는 모노레일에서부터 이어지던 침묵을 지켰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차의 엔진 소리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우리의 침묵 사이에서 맴돌았다. 익숙한 노래가 나오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노래를 흥얼거렸다. 왼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도로에 이르자, 그제야 대현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런 길을 오토바이로 바람을 맞으며 다니면 좋을 텐데."

누군가와 친해진 계기를 떠올릴 때 언제나 그렇듯 어떤 경험이나 매개물이 있듯이, 그와 친해진 것을 떠올릴 때면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에는 주로 오토바이가 있었다. 우리가 살았던 곳은 하다못해 버스를 타려면 꽤 먼 거리를 걸어 나가야 했고, 한번 기다리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한 탓에 부지런한 어떤 아이들은 농사 중에 벌어지는 여러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해 머리가 굳기도 전에 오토바이나 경운기 등의 교통수단을 배우는 경우가 있었다. 그가 바로 그러한 케이스였고 덕분에 우리는 그의 오토바이를 자주 얻어타곤 했다. 그의 뒤에서 바람을 맞으며 오토바이를 타고나면 오토바이의 몸체로부터 사타구니 주변으로 전달이 되던 덜덜거리는 느낌이 한참을 가곤 했다. 그저 그의 뒤에서 바람을 가르고 진동을 느끼던 그 느낌을 잊지 못하겠는데, 그야 오죽하겠는가? 그 시절 그는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망아지였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길게 뻗은 이 도로를 보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위험해."라고 말하고 그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어."라고 반쯤은 농담 식으로 말했다. "내가 조심하더라도 위험한 상황은 언제나 존재해. 갑자기 차가 튀어나올 수도 있고, 눈앞에 큰 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그럴 때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으면 넘어지는 거야.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되 실제 그런 일이 있을 때 긴장하지 않는 게 중요해."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처럼 내게 말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녀석의 입에서, 원론적이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며 어쩌면 그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살아 있던 순간을 떠올리고 또한 그렇게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금기, 금지된 것, 위험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었다. 그 욕망의 세상에서의 실수는 곧 죽음이 될 수 있었다. 물리적이든, 사회적 죽음이든 간에, 그렇게 죽음과 바로 이어진 아슬아슬함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에 긴장하지 않고 눈앞의 죽음을 마주하여 물리치는 것은 바로 생의 의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체적으로는 살아있음에도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마치 넘쳐나는 대기 속에서 숨을 쉴 때에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다가 물속에서 한참 숨을 참고 있다가 고개를 쳐들고 헉헉거릴 때, 공기가 있음을 실로 느끼게 되는 것처럼, 그는 오토바이를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래서 저 말에서 나는 그가 초원을 달리던 말의 추억처럼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듯했다. 불현듯 그가 차의 속도를 냈고 금세 앞에 있던 차 몇 대를 추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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