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보며

연재 소설 (16)

by Chris

차에서 내리자 한낮의 따사로운 태양이 살갗에 닿았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잡아 온 가자미와 함께 저녁에 먹었던 반찬 몇 가지를 꺼내 점심을 준비했다. 발코니의 파라솔 아래 식탁에서 식사하려던 찰나에 맞은편 펜션 마당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한 여성이 나와 문 안쪽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다른 여성을 부르고 있었다. 뒤에 있는 여자는 신을 신으면서 한 손으로는 신발장 위에 있는 에코백을 들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먼저 나온 여성은 플랫 슈즈와 파란 반바지, 붉은색 나시티를 입고 햇빛을 가릴 만한 둥근 챙의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마도 근처로 해수욕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다른 여성은 머리끈을 하고 흰 티에 형광의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맑은 햇살로 인해 그녀들의 모습은 더 발랄해 보였고 선명해 보였다. 그저 건너편 건물의 마당일 뿐이었는데, 그곳에는 어떤 불안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이 있어 보였다. 심지어 곳곳에 비치는 그림자들조차 그러했다. 저 장면의 주인공은 저 두 여성이었으나 그녀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분명히 이 맑은 햇살이었다.

그녀들은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 외모였으나 그 밝은 표정에서 느껴지는 순수성이 곳곳에 있었다. 그녀들의 움직임을 잠시 멍하게 보다가, 문득 휴대폰을 들어 메신저를 켜고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을까? 연락해볼까?' 이런 생각에 이르자 다시 심장이 뛰고 미칠 것 같은 답답증이 밀려왔다. 가슴에는 나의 모든 것을 찢어 발길만 한 불이 다시 지펴졌다. 그럴수록 철저하게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들었다. 음산해지고 싶고 잔인해지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다시 바깥에서 움직이는 그녀들을 보았다. 무엇이 좋다고 저리 웃는지 모르는 저 여자들 틈에서 아무 생각 없이 향락을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 순수한 웃음을 가진 여인들의 숨겨진 욕망은 무엇일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갈가리 분해된 가자미를 깻잎에 싸 입으로 밀어 넣는 것뿐이었다. 답답증에서 벗어나려면 그 속에 뭐라도 처넣어야만 했고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오른손으로는 입에 밥을 밀어 넣으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그 메시지 안에 어떤 신비로운 의미라도 찾으려고 기대할 때마다 '이건 그냥 평범한 대화일 뿐이야!'라고 여기는 의식적인 생각으로 꼭꼭 억눌렀다. 그런데도 그녀의 사소한 말조차 달콤했고 때로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와의 사소한 대화 하나조차 내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대화가 아닌 더 많은 것들을 삶의 부분에 편입시켜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녀와의 대화, 그녀의 몸짓, 표정이었다면, 다음은 그때 그녀가 입은 옷, 공간, 날씨, 그리고 때마침 본 시계 속의 시간이 의미가 되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미래를 소유하고 싶었다.

내 삶이라는 회색빛의 도시 안, 그 중심에 그녀를 세워두고 싶었다. 그 중심에 빛나는 그녀를 둔다면, 단조로운 그 도시 곳곳은 빛으로 물들리라. 손가락 끝으로 휴대폰 반대편에 있는 성녀의 글과 사진을 계속 움직였다. 손끝 너머에는 끝내 닿을 수 없는 그녀의 세상이 있었다. 그래도 난 그녀가 너무 좋았다.

“당신은 세상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대를 떠올리기만 하면 저는 행복해집니다. 사소한 농담에도 잘 웃는 모습이 떠오르고 잠시나마 함께 걸으면 그대의 입가에 보이던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마냥 행복해집니다. 이것조차도 혹시나 그대에게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해서 잊어보려고 해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당최 막을 수 없네요. 이 편지를 쓰는 까닭은 그대가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건 누구와 있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과 당신이라는 사람이 그토록 누군가에게 행복감을 주었던 사람이란 걸 아셨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주는 대단한 사람이기에 당신이 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전긍긍하지 말고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슬픈 일은 모두 떨쳐버리고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찬 날들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나 살다가 있을 고된 일이 있다면, 그 고된 일은 누군가에게 넘겨버릴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받아 감당할 수 있으면.... 제가 넘겨줄 수 있는 행복이 있다면 그대에게 기꺼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언제나 간절합니다. 나라는 사람이 부족하여, 그대에게 좋은 인연도 좋은 추억도 될 수 없겠지만, 언제나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진실로 바라건대, 삶이 팍팍하다 느낄 때, 단 한 번이라도 이 글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마저도 부담스럽다면 과감히 삭제하고 나를 잊어주기를 바랍니다. 늘 고맙고 미안합니다.”

그대는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과 내 마음의 흔들리는 감정을 정리할만한 글을 주저리주저리 쓰다가, 문득 유치하다는 생각과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어 지워버렸다. 나는 실로 겁쟁이였다.

태양은 구름을 반쯤 가려 우리 쪽과 마당 일부에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잠깐의 소음이 사라진 마당과 마을은 조용했고 이따금 골목을 지나는 차의 엔진과 자국 소리가 났다.

그녀의 환영에서 벗어나면 저 마당에 있던 여인들 사이에서 지낼 수 있을까? 무거운 심정을 거둬내면 여인들에게 느껴지는 따사로운 햇살의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저곳으로 들어가 깔깔대고 웃으며 산다는 것은 별것 아니라고. 그냥 먹고 즐기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면 고집스럽게 자기 자신을 고수하던 나를 벗어던질 수 있을까?

"나는 말이야. 만약 시간을 되돌려 다시 대학 시절로 간다고 해도 별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아. 옆에 악마 같은 친구 하나가 있어서 내 삶을 다른 쪽으로 이끌어 준다면 또 모를까." 마당 위에서 이제는 갈 채비를 다 마친 그녀들을 보면서 대현에게 말을 꺼냈다. 휴대폰으로 SNS을 보고 있던 그는 나를 한번 보더니 피식 웃고는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대학 시절, 누구도 나의 어린 시절이나 과거를 모르는 친구들 틈에서 나는 나를 바꾸는 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유쾌하고 잘 노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나 자신도 한동안 완벽하게 바꾼 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살았다. 나는 그 틈 속에서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삶도 잠시뿐, 그럴수록 내 마음의 공허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점차 그 어떤 것도 흥미롭지 않게 되었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과의 관계도 점점 무미건조해졌다. 연애 또한 잘 안 되어서 어느 날부터는 여성에 대해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던 모든 것을 인정한 지금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결국 정해진 운명처럼 여겨버린 탓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라면, 잔잔한 마음이 필요했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시시때때로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를 보기 전에는 만남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고 만날 때는 행복함이 느껴졌고 헤어지고 나서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저녁이 되어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릴 때는 초조함이, 그리고 이 모든 게 그저 인사치레 정도라고 느껴질 때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며칠간 보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때에는 답답함이 일었다.

내 의도와는 무관한 마음의 변화는 한동안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녀는 소유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그토록 그녀를 갖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나는 내 고지식한 첫 의도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그저 현재의 내 삶에 중요한 사람 중 하나이며, 나는 언제나 그녀를 우아한 태도로 대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녀의 인생을 존중하며 결코 질투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단단할 것으로 생각했던 이러한 다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모든 순간에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고 또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 다짐을 지킬수록 피로감이 엄습했고 불현듯 떠오르는 질투심과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나 자신도 그녀 주변의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구나!'라는 환멸감을 불러일으켰다.

제발 이 사태를 벗어날 그 무엇이 어떤 방향으로든 나를 인도해줬으면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마음의 쳇바퀴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 같았다. 나는 내 마음을 뒤흔드는 이 위기에 대응할 어떤 용기조차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지금을 벗어나려면 스스로 좀 더 개방적일 필요가 있었고 우울함에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또다시 즐거움을 추구해야만 했다.

가자미 식사를 마치고 해수욕장이 아닌 바위들이 가득한 스노클링 포인트로 향했다. 수면 위로 솟아오른 바위 밖으로 파도가 부딪쳐 변화무쌍한 흰 거품을 만들어냈고 바위의 틈을 뚫고 들어왔다. 『위험』이라고 붙어 있는 팻말이 무색하게 빨간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영하고 있었다.

기괴하게 만들어진 바위들은 수십만 년 이상 파도를 막아선 탓인지 모두 사선이었다. 복잡하고 울퉁불퉁하게 생긴 제각기 다른 모습의 바위들도 멀리서 보면 유사한 사선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바위는 거친 파도가 치는 외부의 공간과 잔잔한 공간을 구분하고 있었고 바다의 색마저 안과 밖을 다르게 만들었다. 그 공간의 에메랄드 빛은 어떤 순수함을 생각하게 했는데, 펜스에 붙어 있는 '위험'이라는 단어가 제법 그 공간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저 공간은 그녀와 같았다. 저 순수한 바다의 위험만큼이나 그녀의 인상에서 비치던 투명한 순수성과 아름다움은 나를 환희의 세계로 인도함과 동시에 위험에 빠지게 만들었다. 또한 그녀 앞에서 스스로 정해 놓은 규칙이 무너져가자 한편으로는 더 높고 촘촘한 울타리를 만들고 싶은 욕망도 동시에 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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