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발코니와 해변에서.

연재 소설 (18)

by Chris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려니까 문에서 친근한 목소리 하나와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두 개가 번갈아 가면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대현과 낮에 본 여성 둘이었다. 신발을 벗으면서도 대현은 계속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방의 공기가 달라질 만큼 화기애애한 소리가 문 밖에서 안으로,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안쪽까지 퍼져나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를 줄이며 그들에게 인사를 했고 이어서 조금은 놀란 듯한 눈으로 대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러모로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중에 하나는 낯가림 없이 모르는 사람과도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누군가를 데려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나와 상의 없이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욱이 놀랐다. 그래도 싫지 않았던 것은 며칠간 보낸 둘만의 공간 안에 다른 존재가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이제 세 번째 만남이 되는 친근한 여자가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비교적 편안하게 그녀들에게 이야기를 꺼내면서 웃음이 넘치는 저녁 식탁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또한, 낯선 곳에서 있는 여행객의 자유분방함의 미덕을 따라 행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전망이 참 좋네요. 저희는 1층이라 이렇게 내려다볼 수 없었어요. 음식에 맞는 술이 필요할 거 같아서, 와인을 가져왔어요. 혹시 저희가 도울 일 있어요?"

바다에 인상을 남기고 간 여성이 신발을 벗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둘러 주방으로 간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로부터 받은 와인을 우선 냉장실에 넣고 발코니 식탁으로 안내했다.

두 여성이 발코니 식탁에 앉고 자기가 사는 마당과 팬션을 바라보며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 음식을 들고나가려는 대현에게 가서 낮은 목소리가 어찌 된 일이냐며 속삭였다. "왜? 고민할 거 없잖아. 그냥 우리는 지금 상황을 즐기면 돼. 우리가 나쁜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예외적이긴 하지만, 이런 것도 재밌잖아. 이후에는 뭐, 어떻게든 되거나 안되거나 하겠지. 잘되든 안되든 시간이 지나면 여행이 끝나는 것은 매한가지니까. 우리 여행 자체가 목적지만 있었을 뿐, 계획이 없던 여행인데, 거기에 그런 우연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뿐이야." 그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에게는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서로의 사소한 관심사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행위는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필요했다. 더구나 그에게도, 나에게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성이 필요했다.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그의 허전함을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정서적인 안정감을 만들어내는데, 그 아름다운 여성이 귀를 기울여 대화를 나눌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선물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랑은 그 선물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라는 착각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언제나 이것이 나만을 위한 것인가라는 의심이 더 컸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사랑에 관해서는 까다롭거나 관심이 없는 존재처럼 보이게 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자 무감각함마저 더해져 뭐가 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고 사랑에 필요한 용기를 낼 기회마저 줄어들었다. 타인의 관심이 사랑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의사 표현의 한 종류라고 확신하는 일은 나로서는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여자를 만나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혹은 두려워하더라도 그것에 진저리 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대현이 이따금 대단하다고 여길 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남성으로서 해야 할 일을 의당 하고 있었고 최선을 다했다. 사랑과 연애라는 관념 자체에 가볍게 접근하는 것은 아니었고 나처럼 무겁게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었다.

여성들을 앉혀 놓고 맞은 편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게 이야기하는 대현의 얼굴은 주변에서 갑자기 켜진 불빛들로 인해 광채가 나는 듯했다. 서둘러 야채와 반찬들을 세팅하고 드럼통을 반쯤 잘라 만든 그릴 아래에 숯을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 그 위에 고기와 소시지, 버섯 등의 야채를 올렸다. 불꽃이 고기를 달구는 동안, 그는 계속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이야기하면서 세상이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갔고 주변으로 설치한 크리스마스에나 볼 법한 작은 등들이 계속 반짝거렸다. 술 몇 잔에 다들 얼굴이 빨개져 갔지만, 어둠과 작은 등의 불빛과 그릴에서 아래에서 올라오는 붉은빛은 모두의 홍조와 어색함과 적당히 가려주었다.

낮에 내가 물을 뿌린 여성은 자신을 서진이라고 소개했고 낮에 그녀를 마당에서 기다리게 했던 여성은 연경이라고 했다. 휴가철을 맞아 그녀들 역시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우리는 사소한 농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점차 각자의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현이 나에 관한 이야기를 대신 전하며, 글을 쓰고 있다고 하자 둘의 관심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고기를 자르다 말고 갑자기 받은 주목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누구에게 글을 쓴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위치인가?' 그녀들은 어둠에 가려진 내 당혹스러움을 보지 못한 것인지 연이어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무엇을 쓰고 있어요?" "소설을 쓰고 있어요." "장르가 뭐예요?" "순수문학입니다." "작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도 아직 작가라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가장 좋아하는 책이나 작가는 누구예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나 동경하는 작가는 없어요. 다만, 될 수 있으면 저 자신의 기준에 의해 좋은 책이라고 여기는 책을 읽으면 그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아요." "대단해요!" 그녀들은 둘은 마치 자신이 여태껏 동경해 왔던 미지의 세계를 다녀온 여행자라도 발견한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계속 동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부끄러워졌다. 상황이 어색해지지 않도록 창피함을 무릅쓰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성실하게 하면서 동시에 관심은 다시 대현으로 돌려주고 싶었다. 이 장소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대현이기를 바랐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칭송을 받아야 할 대상은 대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럽게 발견한 흥미로운 소재에 관하여 더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저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작가가 되는 걸 꿈꿨어요." 서진은 앞에 있던 맥주를 한잔 들이켜더니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단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써서 공모전에 내기도 했죠." "그랬군요." "아직 그 꿈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지만,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더군다나 순수 문학은 돈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문학을 도전한다는 분을 보면 대단하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너무 부끄러워요. 아직 무언가를 쓴 것도 아니고, 글을 쓴다고 말은 하고 있으나 실상 무언가를 완성한 것도 아니니까요. 오히려 지금껏 변죽만 울린 것 같아서 매번 작가가 되고자 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너무나 부끄러워요. 자기소개를 하면서 백수라고 하기 그러하니 작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고는 하지만, 할 때마다 마치 모래를 삼키는 느낌이랄까요?" "계속 노력하고 있잖아요. 책 완성되면 꼭 알려주세요! 그럴 게 아니라 미래의 작가에게 미리 사인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네요." 나는 그녀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몇 초간의 정적이 되자, 나는 급하게 화제를 돌리고자 낮에 있던 일을 꺼냈다. "낮에 바다에서는 죄송했어요. 친구에게 장난삼아 물을 뿌린다는 게 그만 서진 씨에게 뿌렸네요." "에이, 별것도 아닌데요. 어떻게 보면 그 덕에 우리가 이렇게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녀는 대현이 자신을 데리러 오게 될 때, 아까의 우연을 소재로 인사를 건넸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은 점심에 자신들이 마당에 있을 때 우리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조금은 더 친근한 감정을 느껴졌다. "그랬군요. 사실은 저희도 두 분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밖의 풍경을 보다가 소리가 들려 마당을 보니 둘이 나오시더군요. 그래서 아까 바다에서 한 번 더 보았을 땐 더 반가웠습니다." 대현이 반가움을 표시하며 이야기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그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자신이 가져온 수많은 양념이 들은 상자에서 시나몬과 흑설탕을 가져왔다. 접시에 둘을 섞고서, 별도의 맥주잔 4개를 뒤집어 주둥이에 묻히고 나서, 맥주를 따라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는 또한 좀 더 분위기를 내려고 집에서 가져온 휴대현 프로젝터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밤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그는 늘 그렇듯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여성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 여행의 만족감을 주려고 귀찮음을 마다하고 있었다. 잠깐의 수고 덕분에 여름이 걷히고 가을로 막 접어들려는 밤이 추억으로 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밤의 감성을 따라 각자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한층 편안한 분위기에서 달콤하지만 씁쓸한, 그러나 또한 시원하기도 한, 맥주를 끊임없이 마셔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앞에 대상들은 상상할 필요조차 없는 실체였고 우리에게 마음의 창을 열고 호감을 표시했다. 나 역시 술을 마신 상태에서 마음의 창문이 조금은 느슨하게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현은 이미 연경을 좀 더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릴 위에 있던 고기가 접시 위에서 차갑게 남아 누구도 손을 대려 하지 않을 때, 연경은 밤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들 그 말에 동의했고 가벼운 걸음으로 근처 바다로 나갔다. 밤바다는 어제와 달랐다. 조금은 더 시원하고 조금은 더 후련한 느낌이었다. 바다는 자신을 표현하는 파도 소리를 시끄럽지 않게 냈다. 황량함 대신에 고요함을 슬픔 대신 환희가 그곳에 존재하는 듯했다.

"둘이 있게 해주는 게 어때요?" 해변을 따라 걸으며 앞서가던 대현과 연경을 보면서 서진은 내 옷의 허릿단을 잡더니 조용히 귀에 속삭였다. 잠시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둘이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어둠 속에서 차츰 흔적이 지워지게 되자, 방향을 바꿔서 걸었다.

우리는 걸으면서 대현과 연경에 우리의 이야기보다 대현과 연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현이 어떤 성격이며 우리 사이에서는 제일 멋진 친구라는 말, 연경은 요즘에 오래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고 일 때문에 힘들어서 퇴사를 고민한다는 말,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말, 둘 사이는 나와 대현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사이라는 말, 어쩌면 둘 다 때마침 연애 상대가 없으니 기가 막힌 타이밍인 것 같다는 말, 이렇게 낯선 곳에서 만났는데 말이 서로 잘 통하는 것이 신기하다는 말 등등.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어제의 가로등 아래 계단에 걸터앉아서 어둠으로 들어간 이들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 번의 우연은 인연일까? 인연이라면 나는 이들은 조금은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옆에서 차분한 음성으로 이야기 나누는 서진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나 역시 이곳에서 어쩌면 일탈일지도 모르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가로등 아래에 있는 그녀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 이야기해요. 어떤 책을 쓰는지 알고 싶어요." 그녀는 이제 우리한테서 떨어져 나간 두 인물에 관해서는 관심 없다는 듯,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조금은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중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실 알다시피, 우리도 그림자 따위에 신경을 쓰는 건 어린 시절 때였잖아요. 지금은 깨닫기 전까지는 그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사라졌는지 알 바 아니죠.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그는 생각합니다. 왜 그림자가 사라졌을까? 그것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그것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죠." "파랑새를 찾아서나 연금술사 같은 내용인가요?" "음…. 무언가를 찾으러 간다는 차원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거 같네요. 여하튼 존재할 때는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다가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그 존재의 부재를 절실히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그런 것을 인식하면서 다른 사소하지만 중요했던 일들을 다시 돌아보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그림자를 찾는 여행을 위해서 무의식의 세상을 여행하는 내용입니다." 이 역시 밤의 감성 때문이었을까? 오랜만에 나만을 위해 집중하는 누군가에게 내 소설의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다가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아직도 동그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정적이 감돌았다. 눈이 제법 예쁘다고 생각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돌려 검은 바다를 보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애들이 늦네요. 할 이야기가 많은가 봐요." "그러게요. 이제 좀 추운데…." 반소매 차림의 그녀는 두 손을 팔에 문지르며 이야기했다. "우리 먼저 들어갈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말했다. 세 번의 우연은 인연일까? 아직도 스스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리고 서진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이것도 잘 모른 채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우리는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용한 대화 속에서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주황빛이 가득한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나직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이대로 올라갈 건가요?" 그녀의 눈빛이 나를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과 눈빛과 얇은 반소매와 반바지를 입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부분이 나와는 다른 곡선이었고 그 실체가 궁금했다. 손을 삽처럼 만들어 그녀에게 던지기 전까지 손에 존재하던 물의 모양과 닮아 있었다. 그 완만한 곡선들이, 손대면 푸딩처럼 말랑거리지만 다시 그 형태를 유지하려고 부드럽게 요동칠 것 같은 그 곡선이 눈 앞에 있었다. 그 실루엣이 실로 예쁘다고 생각했다.

술을 좀 더 마셨더라면,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악마들을 모조리 죽이고 본능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을까? 나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을까?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그녀를 놓아주고 지금 나를 바라보는 서진에게 갈 수 있었을까? 그녀는 머뭇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서진은 함께 있자는 말도, 미안하지만 여기까지라는 말도 못 하는 나를 바라보다가, 어색한 침묵을 답변이라 여긴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여기서 헤어져요. 저는 들어갈게요."

그녀를 그렇게 보내고 2층 계단을 오르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서진과 함께 있던 저녁 시간의 일들은 생각했다.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계단을 한 칸 오를 때마다 후회가 밀려왔다. '달리 행동했더라면, 어땠을까?' 계속, 이 생각이 맴돌았고 어떤 공허감이 밀려왔다. 마지막 계단에 오를 무렵 문득 낮의 대현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안돼.'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문을 여니 대현이 이미 와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늦은 까닭을 물었다. "그냥 너희를 기다리다가, 서진 씨와 이야기 나누면서 걸었어. 너는?" 그에게 차마 그녀의 제안에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졌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를 구원해 줄지도 모를 사람을 그렇게 놓쳐버렸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저 이 밤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너희라는 것처럼 말했다. 사소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기쁠 일도, 슬플 일도 그리고 자책할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서진과 만난 세 번의 우연은 그저 우연일 뿐인 것처럼 말해버렸다. 처참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런 것쯤은 며칠 지나면 잊어버릴 일이었다. 사랑은 사치였고 우연은 몇 번이라도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

"나도 계속 이야기했지. 내일은 연경 씨가 근처에 좋은 곳이 있다기에 같이 갈 거야." 그는 내 의견은 구하지 않은 채 당연하게 함께 할 거라는 듯이 말했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의 기쁨을 망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불을 끄고 누우니 잠깐 머리가 핑핑 도는 듯한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창문에 커튼마저 쳐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희미한 잔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잔상을 기준으로 하여 서진의 모습이 별자리처럼 그려졌다. "이대로 올라갈 건가요?"라고 묻던 서진의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이내 내 앞에서 얼굴을 가리고 오늘 같은 어둠 속에서 처량하게 울던 예전의 그녀로 바뀌었다. 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 뒤로 보이던 미세한 떨림과 긴장을 보고 싶었다. 그 손을 걷어내고 머리를 맞대고 그녀의 모든 것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며 그 미세한 떨림에 입맞춤하며 한없이 위로하고 싶었다.

'괜찮아. 괜찮아.'

오른팔을 들어 고개를 가린 채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한시라도 검은 공간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랐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어떤 것도 제거하지 못했다. 세상의 어둠과 나의 현기증을 틈타 내가 붙잡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이 형상을 만들어냈다. 내가 눈을 뜬 것인가? 감은 것인가? 슬픈 기억의 형상들은 밤새 내 주위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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