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19)
나는 그리 높지 않은 벼랑 위에 서 있었다. 그 아래에는 물이 있었고 수많은 내가 환호하며 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며 아래로 뛰어내리라고 소리쳤다. 나의 다리 역시 이미 뛸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 팔도 뛰어내리기 직전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근대는 내 심장이었다. 심장에서 아까부터 들려오던 이 쿵쾅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 다른 소리는 들을 수조차 없었다. 아래에서 소리치는 또 다른 나의 얼굴은 그 입 모양만 확인할 수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 감고 딱 한 번만 뛰어내리자!' 벼랑 위의 나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러나 발이 벼랑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옆의 누군가가 자신감 있게 뛰어내렸다. '이것 봐! 아무것도 아니잖아.'라며 나를 비웃듯이. 그럴수록 숨이 가빠졌다. 이 순간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벼랑 아래에서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나의 시선들이 느껴져, 이곳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벼랑에 앉아 아래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뛸 생각을 하고 벼랑 위에 다시 서기만 하면 다리는 떨려왔고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오르기 전까지는 별것 아니라고 여겼는데, 나에게는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한 시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어떤 나는 그냥 내려오라고 하고 있었다. 또 어떤 나는 아직 뛸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아래의 어떤 나는 '병신, 머저리'라는 입 모양으로 조용히 욕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올려다보는 모두의 시선은 점차 기대에서 무관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가자, 점점 벼랑 아래의 수많은 나는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고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며 벼랑 아래 관중석에서 자리를 떴다.
모두가 자리에 뜨고 아무도 없는 벼랑 위에서 나 역시 석양을 맞이했다. 저 석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늦게 오지도, 빨리 오지도 않았다.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벼랑 옆에서 오랫동안 그 곁을 지켜오던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목이나 멜까?"
온몸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문득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꿈속의 석양은 제법 아름다웠고 바람은 꽤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꿈에서는 오래전 나에게 관심을 보였던 한 여자아이가 등장했다. 나는 작은 내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햇빛이 비치는 이층 집이었던 것 같다. 침대 위에는 그녀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침대 위에 그녀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나는 누운 상태로 고개를 젖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눈을, 앳되어 보이는 볼과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봉선화가 떠올랐다. 장미의 붉은색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약간의 불그스름과 핑크빛이 감도는 그녀의 볼과 입술은 봉선화 그 자체였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느껴졌다. 꽃을 안듯 안아보고 싶었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기에 그것이 깨질세라 가만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 두근거림은 방망이질을 하듯 쿵쾅거리는 것이 아닌 예쁜 것을 볼 때 느껴지는, 무엇인가 애틋함이 느껴지는 것 같은 두근거림이었다. 꿈에서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있었고, 소유하지 못하면 후회가 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에 그녀는 어떤 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비비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고 그녀 역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외모적으로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습과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봄날 같았다. 지금이 여름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녀를 보면서 봄이 느껴졌다. 봄의 아름다움, 봄의 새싹, 봄의 청초함, 봄의 선선함이 그녀를 통해 오감으로 전해져왔다. 이 작은 방이 더는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꿈에서도 나는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한 공간에 둘이 있음에도 마지막 순간에는 항상 나의 이성이 나의 행동을 붙잡았다. 더군다나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조차 알고 있었다. 욕망의 공간 속에서도 나는 고민을 했다. 꿈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창살이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깼어요?"
그녀가 아직은 졸린 듯한, 그리고 미칠 듯이 귀여운 모습으로 말했다. 나 역시 무슨 말을 한 것 같다. 그러나 말보다도 분위기, 기분, 배경만이 강렬하게 떠오를 뿐, 도통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한마디 말과 미소, 그것으로 나는 이 아이가 결코 떠나지 못하는 그녀임을 깨달았다. 얼굴이 다른 그 여자아이에게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잠에서 깨니 아직 4시였다. 밤은 아직 길었고 누워도 잠은 오질 않았다. 휴대폰에 있던 그녀의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문득 조용히 시가 쓰고 싶어 옆방으로 나왔다.
동그라미, 원 안에 네가 있어.
그 안에 작은 한 점, 그게 바로 너야.
아무것도 없는 동그라미 위에 찍힌 점 하나
괜스레 신경 쓰여 계속 들여다보네.
세상에 수많은 동그라미와 점이 있을진대
그대라는 점이 내 안에 들어와 파장을 일으키고
나는 그대로 인해 새로운 동그라미를 그리게 되네.
그대를 중심으로 하는 동그라미를.
나라는 동그라미, 그대라는 점
그대가 그리는 파장이 동그라미 끝에 모두 닿길
점 하나에 사랑을 담고
잔잔한 파장으로 나를 감싸주오.
동그라미 원 안에 내가 있어.
그 안에 작은 한 점, 그게 바로 나야.
시를 쓰는 동안 날이 밝아왔다. 닫힌 커튼의 틈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 왔다. 햇빛이 비치는 곳에는 부유하는 먼지들이 조용히 떠다니고 있었다. 그 공간에서는 먼지와 햇빛 말고는 없었다. 이리저리 떠다니는 먼지 하나가 햇빛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응시하다가 다시 대현의 짙은 숨이 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