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20)
아침 10시가 되자 우리는 일어나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것 중 쓸만한 것들은 모아 그가 가져온 상자에 넣었다. 아침의 햇살을 보면서 오늘은 덥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서 보니 연경과 서진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마당으로 나오고 있었다.
"잘 잤어요?" 서진은 어제의 일은 마치 기억하고 있지 않은 건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다.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는데, 그렇다고 함께 있을 때처럼 친근하게 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가로등 아래의 모습이 슬라이드처럼 연이어 떠올랐다.
"고마워요." 그녀의 짐을 들어 트렁크에 실어주면서 그녀는 저녁 식사 시간의 모습처럼 대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뜨거웠으며 매혹적이었던 감정이 차갑게 식었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감정뿐 아니었다. 그녀와 가까웠던 어제의 물리적 거리 역시 멀어져 그녀는 이제 거의 연경의 뒤에 붙어 있다시피 했다. 서로 아는 사람으로서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였다. 그렇게 변한 탓이 내 탓이므로 어떤 할 말은 없었다. 그녀가 차갑게 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싸늘한 시선, 눈 흘김이 없는, 어떤 긴장감도 없이 그저 아는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예의를 보이고 있었다. 왠지 모를 약간의 서운함과 불현듯, 어쩌면 이러한 모습이 어제의 행동에 따라 나에게 내려진 처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 않을 것일까?
내 옆얼굴을 정밀하게 관찰하던 어제 그녀의 시선은 이제 나를 멀리서, 그것도 어쩌다가 한 번씩 바라볼 뿐이었다. 나의 말과 걸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어제와는 달리,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했다. 마치 얼굴을 알고 있지만 서로 잘 모르는 같은 반 친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한때는 가까웠다가 서로 소원해지고 각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다른 친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행동, 말투, 시선은 이제 더는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그저 각자 따로 존재할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했지만, 문득 서글퍼졌다.
세 번의 우연한 만남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심리적 거리가 그녀가 우리의 발코니 위에 올라왔던 어제의 식탁과 같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좋은 친구를 잃고 싶지 않고 당신 피부의 주름이나 눈동자의 색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대의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영역 안에 있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대와 나 사이의 거리를 고정하고 선을 넘지 않는 영역에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제 일에 대한 변명일 뿐이었고 결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비겁한 말이었고 자신의 감정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었다. 그저 나는 어제 느낀 그 감정과 느낌은 그것대로 추억 속에 보존한 채, 익숙한 방식으로 변화된 그녀와의 거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늘 그렇듯 그 허전함을 참을성 있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진과 헤어지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던 거리감도 완전히 희미해져 버릴 것이었다. 우연은 그렇게 우연으로 끝날 것이었다. 우연한 여행에서 본 산과 바다와 동굴처럼 그녀 역시 그 여행의 우연한 요소로만 기억될 것이었다.
그렇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녀뿐이었다. 그녀가 멀어지려 할 때면, 나는 언제나 그녀와의 심리적 거리를 측정하여 조금씩 움직였다. 더 가까이 가지도 않고 멀리 가지도 않는, 부르면 들릴 영역 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안에서 그녀를 회상하기를 반복했다. 긴 회상 후에는 우울감이 찾아왔는데, 이따금 그 우울의 감정이 그녀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우울은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을 실현하지 못한 우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심리적 거리를 측정하여 새로운 곳에 말뚝을 박은 뒤에는, 매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녀가 그려졌다. 그렇기에 그녀를 생각하는 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또한, 이따금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던 장소에서조차 그녀가 있는 모습을 그려보거나 혹은 그녀가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그려낼 때가 있었는데, 그러한 까닭에 어떤 때에는 실제로 그녀가 행한 일이었는지 혹은 내가 만들어낸 상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수많은 감정의 위치에서 나는 그녀를 늘 새롭게 보았다. 그녀에 관한 상상으로 인하여 나는 이따금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그럴 때면 나라는 로봇을 조종하는 진정한 나라는 존재가 그 안에서 번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그녀가 분명히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히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용기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자기혐오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미리부터 체념하게 하여 정신적 고통을 조금이나마 경감시켜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체념이 그녀에 대한 나의 위치를 조금이나마 명확히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좁혀보고 싶은 마음과 체념 상태에 존재하는 나의 현 위치와의 간극이 언제나 내 고통의 원인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멀어지지도 못하고 가까워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내 욕망은 '내가 그녀를 위하여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이라는 물음을 낳기도 했다. 이는 그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보다 좀 더 강력하며 현실적인 물음이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어설픈 소망보다 그녀에게 현실적인 힘이 되어주려면 나는 영향력 있는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로부터 무언가를 이루까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인내심이 나왔으며, '그녀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로부터 빈곤을 탈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나왔다. 그녀는 실로 나를 현재의 삶에서 구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가난해도 된다는 생각을 전복하고 매번 무너져가는 나의 다짐, 그저 소망만 할 뿐 이루지 못하던 일들을 끈기를 갖고 할 수 있도록 했다.
내 삶의 중심이 그녀로 인하여 변화했기에, 이따금 그녀가 삶에 고민하고 방향을 못 잡을 때면, 너무나 슬퍼졌다. 그저 우울에 찬 눈빛만으로도 슬퍼졌는데, 그럴 때일수록 '내가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흔들리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나는 단단해야 했다. 어두운 그녀의 앞길에 사소한 가로등이라도 되었으면 싶었다. 길을 잃은 내가 그녀 덕분에 방향을 잡았듯 그녀의 길에 사소한 발자국 하나라도 남겨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녀가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그녀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만은 하지 않기를. 그대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알기를.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할 때면, 나는 언제나 내 눈빛에서 그녀가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여행지에 와 있으면서도, 그녀에 대한 환상 속에서 새로운 환희를 만들었고 그녀와는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는 현실의 체념 속에서 그녀를 지워버리고 있었다. 나는 그사이 어딘가에서 계속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짐을 트렁크에 다 넣자, 그녀들은 근처 바닷가 벽화 마을에 유명한 커피숍에 있다며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방을 모두 정리하고 방을 키를 주인아주머니에게 건네니 연경과 서진을 태운 차가 먼저 떠났다.
"저녁에 무슨 일 있었어?" 우리도 차에 타자마자, 대현이 내게 물었다. "응?" 내가 뜬금없다는 듯 쳐다보자, "아니, 둘 사이에 느낌이 어제와는 달라서랄까?"라고 멋쩍게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별일 없었어…."라고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별일이라곤 없었으니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히 좋은 느낌이 있었다. 그녀도 그것을 느끼고 어쩌면 확신했으니 용기를 내어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신호를 보낸 내 탓일까? 나도 어제의 밤은 싫지 않았다. 아니 눈 한 번만 딱 감았다면, 그 밤의 공기에 기대어 그녀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술기운을 빌렸다면 마술처럼 내 마음에 있던 마지막 봉인이 풀렸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녀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적어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남들처럼 대하는 방법을 몰랐다. 더 나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던 것은, 좀 더 밤을 보내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단호하게 거절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함께 있자고 말하지도 못하고 가로등 아래에서 머뭇거렸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쩌지 못하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 그녀의 처지에서 감정이입이 되자, 눈앞의 사람에 대해 한심함과 자신에 대한 비참함이 두 눈으로 올라왔다.
푸르른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한참을 달리다가 이윽고 어느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작은 길을 따라 위쪽으로 향하니 하얀색의 등대가 보였다. 하늘의 옅은 파랑과 바다의 짙은 파랑, 그 중간에 있는 하얀색의 등대가 꽤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어느 광고를 상상하게 하는 장소였다. 자연스럽게 광고에서 존재하는 파란 원피스를 입은 한 소녀가 떠올랐다. 그 상상 속에서는 바다와 하늘을 닮은 하늘거리는 파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얼굴을 한 소녀가 등대처럼 하얗고, 둥근 챙이 달린 모자를 바람에 날아갈까 봐 가볍게 움켜쥐고서 저기 저 하얀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를 찾아 여기까지 온 나를 위하여 한번만 돌아봐 준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해질 것 같았다.
어느 날인가, 그녀가 파란 원피스를 입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그 원피스는 내가 지금 상상한 원피스도 아니었고 구도도 행복감을 준다기보다 어딘가 진취적인 느낌이 드는 형태였다. 하늘은 어둑어둑해져서 짙은 파랑에 군데군데 붉은색이 보였고 화면의 반절을 차지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로버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게 했다. 사진으로는 볼 수 없는 그 너머의 세상은 웅장하나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을 것이고 그녀는 두 눈으로 그 짙은 풍경의 세상을 담아내고 있었을 것이었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아, 나는 한 길을 또다른 날을 위해 남겨
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가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로버트 프로스트 외, <가지 않은 길-미국대표시선>(손혜숙 옮김, 창비, 2014)
이 생각에 이르자 결코 그녀가 지켜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가 아님을 실로 깨달았다. 그녀는 그 자체로 거대하며 담대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사진에는 어떤 외로움도 느껴졌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두 다리로 서서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풍경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쪽에서는 그 옆에서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나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었으며, 그곳에 다다르려면 최선을 다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하얀 등대를 뒤로 한 채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바다와 하늘 그리고 배들을 바라보았다.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는 탁 트인 세상에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의 다른 파랑이었다. 그 두 가지 색이 마음마저도 시원하게 했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보았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좀 더 밝은 파랑의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세상에서 나는 정말 그녀를 놓아주고 홀가분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어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차마 '차단' 버튼을 누를 수는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건 눈앞에 보이지 않게 '숨김'으로 놓는 것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반항이었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며 또한 소유하지 못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속에서 갈팡질팡하며 그저 그녀를 ‘숨김’으로 해놓는 일에 스스로 만족하고 '너는 참 안 되는 놈이구나.' 하며 조롱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바다를 배경으로 한 번, 등대를 배경으로 한 번씩 사진을 찍고서, 그 자리를 뜨기 전에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으로 찍힌 내 모습은 무척이나 초라하고 어색해 보였다. 경직된 모습에 피부에 나이의 흔적이 가득했다. 같이 찍은 사진은 대현과 연경이 거의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었고 대현의 뒤에 내가, 연경의 뒤에 서진이 얼굴을 내밀고서 위에서 찍은 모습이었다. 대현이 가져온 셀카봉으로 찍은 이 사진에 앞의 둘은 기쁜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연경 뒤의 서진의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기쁜 것 같기도 혹은 슬픈 것 같았다.
비극처럼 찍힌 나의 사진을 보며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수십 번이고 머릿속을 오갔다. 그녀를 사랑하나 갖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미워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로서는 결코 그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절망감을 느낄 때는 그녀를 미워하고 싶은 기분은 극에 다다랐다. 그러면서도 그녀 덕분에 내가 삶의 목표나 방향을 갖게 될 때는 또한 그녀가 사랑스러워져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앞에는 절대 드러내지 않지만, 모든 번민이 나를 시시때때로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존재하는 현실을 살아갔다. 나의 이런 복잡한 마음을 누구도 눈치채지를 않기를 바랐다. 나는 여름의 하늘과 바다와 구름처럼 보여야만 했다.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나는 이 여름처럼 멋진 모습이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