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마을에서

연재 소설 (21)

by Chris

우리는 파란색의 청량감과 하얀색의 깨끗한 느낌을 주던 공간의 풍경에서 각자 한동안 돌아다니다가 이내 모였다. 나는 좀 더 새로운 풍경의 발견을 기대하며 천천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지만, 친구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사람이 드문 비교적 조용한 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독이 이 공간에도 존재하려면 어느 위치에서 등대와 바다와 하늘을 보아야 할까를 잠시 생각했지만, 저 청량한 색깔들은 번번이 그런 시선을 방해했다. 나는 기실 이런 선명한 색의 작품보다도 흐릿하며 모호한 작품들을 좋아했다. 터너의 작품처럼 형상과 배경과의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흐릿할수록 좋았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 선명했다. 아름다웠지만, 선호할 수는 없었다.

장작불이 솟아오르는 듯한 전시물의 앞쪽에는 최남선의 시가 있었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글자를 깨뜨려 저 먼 동해로부터 이곳까지 다다르다가 사그라지는 바다의 파도를 나타내려고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의미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시각적으로도 바다와 파도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바다가 가진 여러 형태 중 한 형태를 암시하는 저 'ㄹ'은 그 자체로서는 그저 '리을'일 뿐이었지만, 양쪽의 다른 단어와 점과의 관계에 의해서 바위에 부딪혀 사그라드는 파도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이 'ㄹ'이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로서는 그저 '리을'이라는 여타 수많은 다른 문자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그녀라는 세계에서 내가 관계를 맺었을 때, 나는 바다가 되고 파도가 되었다. 나는 실로 'ㄹ'이었다. 그녀는 나 없이도 바다의 소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다른 단어를 끼워 넣거나 다른 위치에 넣는다고 해도 부조화가 있을 뿐이지,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처......... 썩', '철........ 썩', '처....... ㅇ썩'이라고 해도 처음에는 어색할지언정 그런대로 바다의 맛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꼭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의 의미 자체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처...... 썩'인 그녀에게 알맞은 위치에 있는 존재일 때, 나의 존재 자체도 가장 큰 의미를 발할 것 같았다. 나로서도 공생이며 창조적 관계였다. 그런데도 'ㄹ'이라는 나는 언제나 외로우며 나 자신은 스스로 그녀처럼 하나의 의미로 바로설 날을 또한 기대하고 있었다. 'ㄹ' 자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각자의 감상이 끝나고 다시 모인 뒤에 차를 두고 주차장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길을 걸었다. 한, 두 명 정도 지날 수 있는 길이 계속되었기에 우리는 일렬로 천천히 내려갔다. 곳곳에 여러 미술가들이 그려놓은 벽화와 시의 문구들이 보였다. 흘러가 버린 시간을 잡아 두고 추억으로 우리를 이끌던 그 장소를 보았지만, 우리가 던진 유치한 말들은 "귀엽다.", "재밌네." 등이 전부였다. 미술에 관하여 진지한 이야기를 꺼낼 자리도 되지 않았지만, 어떤 상징이 존재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각각의 벽화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존재했는데, 그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거나 우리 부모 세대가 겪었던 이야기의 일부였다. 이야기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선명했기에 우리 사이에서 그림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유치한 말들뿐이었으리라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화들은 3차원의 건물에 어울리는 그림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마치 공간감이나 입체감을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현대에도 남아있지만 이제 구식이 되어버린, 그래서 누구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그 검고 낡은 건물과 공간에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았던 가장 화려했던 과거 시절 탄광 마을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벽화로 남을 수밖에 없는 옛 추억의 장소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고 웃고 있었다. 온통 낡아진 것들,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옛 추억의 그림뿐이었다. 나도 옛날에는 이랬노라고 뭔가 어울리지 않는 옛 시절의 옷을 입은 건물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사람의 발길이 그리워 자기 위에 덧칠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밤이 되면 깨닫겠지. 과거처럼 자신의 안에 거하며 빛을 밝히던 이들은 더는 없거나 적다는 사실을. 그저 어두운 밤 아래, 자신을 밝히는 것은 가로등일 뿐이며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으로 됐다.'라고 생각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벽화는 칙칙했지만 선명했다. 그 점이 나는 등대와 마찬가지로 싫었다. 공간과 건물이 자신에게도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때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억지로 노력하는 모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또다시 많은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이. 물론 어느 정도는 성공한듯했다. 실제로 주변에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고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대현 또한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분주했다.

등대를 내려오면서부터 대현은 우연 속에서라도 괜찮은 작품 하나라도 건지겠다는 듯이 연방 셔터를 눌러댔다. 이따금 아예 색을 제거하고 흑백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알록달록한 벽화의 색채를 어두운 톤으로 과감하게 눌러버리니 색채에 가려진 건물의 고독감이 강하게 드러나면서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공간이 매력적으로 바뀌었다.

그 흑백의 공간 안에서는 좀 더 짙은 흑백의 건물과 그림을 보는 서진과 연경의 모습도 함께 담겨 있었다. 투박한 건물들과 거칠게 칠해진 시멘트 벽면들, 군데군데 보이는 재단되지 않은 화강석 덩어리들이 과거적 느낌을 더 가미했다. 흑백 화면은 현대적인 그녀를 과거적 공간의 경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화면 안에서 보이는 그녀들의 미소는 이 공간의 슬픔과 모호한 긴장을 만들었다. 그녀들은 저 벽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귀엽네. 재밌네. 잘 그렸네.'가 전부일까? 그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보는 세상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그들이 이 여행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일일 테니까. 지금은 그저 많은 것들을 보고 당장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우연히 만난 세상의 풍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언젠간 그것이 자신의 시가 될 테니까. '처.........ㄹ썩.' 어디선가 바닷소리가 들렸다.

카메라를 들어, 나 역시 이들을 찍었다. 대현이 연경에게 농담을 건네고 연경이 웃는다. 손으로 입을 가리지만 그의 끊임없는 익살로 연경의 눈은 반달이 되고 웃음소리는 터져 나온다. 그 옆에서 서진도 덩달아 따라 웃는다. 어떤 익살스러움이 사진 안에 존재할 때, 나는 셔터를 눌렀다. '찰칵.' 파도 소리와는 다른 아주 짧은 순간 안에 터져 나오는 소리. '처.........ㄹ썩'과 그다음 '처.........ㄹ썩' 사이를 메우는 짧은소리로는 적당했다.

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들을 따라 화면 밖에서 함께 웃어보았지만, 저 풋사과 같은 웃음을 짓기가 쉽지는 않았다. 문득, 어제저녁, 난, 그녀를 벗어나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저녁, 어둠 속에서 가볍게 잡았던 서진의 손이 떠올랐다. 따스하고 말랑거리고 또한 앙증맞은 손이었다. 나의 투박한 손과 달리 부드럽고 정돈된 그 손을 만지작거렸을 때, 손의 온기가 가슴까지 올라오는 듯했다.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샴푸 향 또한 그 온기와 함께 아득함을 느끼게 했다. 잊은 줄 알았던 수많은 감각이 그 온기를 통해 다시 떠올랐다. 저기 저 웃는 서진을 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따스한 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따스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내 안의 그녀를 통해 따스해지기를 바랐지만, 정작 그녀는 내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저 그녀 주변을 서성이면 어느 순간 그녀가 나의 노력을 혹시라도 기억해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이 무성해져서 어느 순간부터 마치 진짜 그녀도 날 따스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었을 뿐이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자, 그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인간이 되었지만, 동시에 닿을 수 없는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온기는 또한 나를 춥고 고독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저 어쩌다 그녀가 던져준 불쏘시개 하나에 감사해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것으로 어수룩하게 '괜찮아.'라고 여겼다.

그녀를 마음에 그리는 것만으로 삶의 방황을 끝내고 그녀라는 빛줄기를 따라 현실에 적응하는 노력을 할 수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녀를 결코 잡을 수 없으리라는 자기 비하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갖가지 이유를 붙이는 것은 그 옛날, 방황하던 시절, 또 다른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 마음을 전할 용기도 없지만, 이 빛을 따라 결국 어느 곳에 도달했을 때, 그녀도 역시 다른 누군가처럼 떠나버리고 없다면, 그 공허감은 전보다 더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의 조바심은 바로 그런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능숙한 솜씨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했고 그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내가 이어온 수많은 콤플렉스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지금껏 내 게으름과 방황 탓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로 말미암아 방황을 마치고 조금씩 꿈에 다가가고 있다고 믿었지만 나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그녀가 떠날까 두려웠다.

그녀는 내 최종 목적지이고 꿈에 이르도록 날 이끄는 도구였다. 그렇기에 무의미하고 무력하게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저 빛줄기를 믿고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달려가야 했다. 비록 그녀를 갖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내가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전과 다르게 실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건 전혀 달라요. 다릅니다. 그녀는 내게 영감을 줍니다. 내가 무언가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까닭은 전적으로 그녀 때문입니다. 나의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에 그녀가 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에도 그녀를 지워내지 못하는 까닭은 그녀가 내 창조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런 환희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감정 탓에 매일 그녀를 새롭게 만나고 또한 이별을 경험합니다. 이별이 두려운 까닭은 아마도 그녀를 영영 떠나게 됨에 따라 나 자신도 예전처럼 돌아가게 될까 봐서인 것도 같습니다. 나는 실로 그녀가 좋습니다. 그녀가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가진 귀한 모든 것들 그녀에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깊은 감동에 빠지니까요. 이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나 자신에게 이건 아니라고 경고도 해봤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녀는 제 모든 것입니다.' 대현의 농담에 모두 함께 웃는 와중에도 이들에게 이렇게 고백을 하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높은 곳에 설치된 등대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여러 형태의 투박한 건물들을 보았다. 옛 영광은 사라진, 낡고 몰락해버린 전형적인 어촌 탄광 마을이라는 흔적은 건물의 갈라진 틈, 투박하게 덧칠한 시멘트의 흔적, 검게 변해버린 벽과 손으로 만지면 떨어지는 시멘트 모래의 흔적에서 알 수 있었다. 간혹 그런 건물의 겉모양은 놔둔 채로 안을 개조하여 커피숍이나 전시관을 만든 곳도 보였는데, 과거의 흔적들이 그런대로 독특한 매력이 되기도 했다. 시골의 마을이 그렇듯 몇 안 되는 거주인을 위한 장소라기보다 이제는 관광객들을 위한 장소라는 느낌이 더 커져 버린 듯했다. 간혹 보이는 집 앞 텃밭에서 쇠말뚝을 타고 올라와 여문 호박이나 고추가 아직은 시골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보였다.

나의 진실성은 저 호박과 고추 같은 것이었다. 저 공간에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그저 잘 여문 호박과 고추로 느끼게 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표현은 피했다. 나 자신의 솔직함은 은밀히 숨겨두고 사소한 말과 행위만을 반복했다. 나 자신은 단 한 번도 밖으로 꺼내놓지 못하고서 그저 내가 거기 있음을 짐작하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그녀가 짐작했을까?' 나는 그녀가 이미 짐작하고 거리를 두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짐작했을 그녀에게 내 솔직함을 보여주기가 두려워 낡은 건물 안에서 꽁꽁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곳에 있으면 적어도 상처 입지 않고 안전하다고 믿으며. 그러나 그게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이 아님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매번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녀와 나 사이에서 있는 진실은 참혹함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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