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크리스마스 이야기

연재소설 - 그림자를 찾아서.

by Chris

부처의 상이 결국 완성되었다. 완성된 얼굴에는 그의 미소가 담겨 있었고 그녀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온 얼굴에 세상의 모든 죄악을 다 용서할 수 있는 자비가 가득했다. 주지 스님 역시 대단히 만족했다. 비록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불상은 아니었지만 보고 나면 따뜻한 인상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신실하게 기도를 드렸다. 아침 해가 뜨는 순간부터 석양의 노을이 불상의 얼굴에 비치는 순간까지 그들은 각자의 바람을 담은 기도를 드리고 마음의 위안을 찾았다. 아버지는 내게 가장 뿌듯했고 인상에 남았던 순간은 석양이 질 무렵 어느 연로한 할머니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던 모습이라고 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간절히 바라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처 앞의 부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 장면을 보며 아버지는 종교를 떠나 그 순간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행복해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게 해 준 세상의 모든 신께 감사를 드렸다.

둘은 이듬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석공이라는 말에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노발대발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나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그 이후에도 다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안 볼 것처럼 여기셨는데,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무척이나 이뻐하시다가가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작품 중 어머니를 만나게 해 준 그 부처상이 너무 좋아서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자주 그곳에 머물다 가셨지만, 그렇다고 종교적 신념을 바꿀 수는 없었다. 종교를 믿지 않던 어머니도 결혼 후 아버지를 따라 교회를 다녔고 그 덕에 나 역시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내게 있어 교회는 놀이터였고 공부방이었으며 사회생활을 배우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는 것은 장난감을 포기할 만큼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날이 제일 즐거웠다. 어린 생각에 매일매일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에요. 견우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이니?”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다가올 무렵, 교회 선생님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크리스마스는 정말 즐거운 날일까? 나는 이해가 안 갔다. 예수님은 모든 것은 다 아는 신이라던데,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을 운명인 것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은 죽기 위해서 온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이 그에게는 정말 기쁜 날일까? 차라리 천국에서 아버지랑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즐거운 일 아니었을까? 이 땅 위로 내려오면서 정말 행복했을까?

“크리스마스는 슬픈 날인 것 같아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기쁜 날이라고 한다면 정말 이기적인 생각인 것 같았다. 정작 당사자는 생각하지 못한 채 우리에게 좋으니까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당장 며칠 아빠를 못 봐도 정말 슬픈데 아빠를 두고 내려와 갖은 비난과 고통을 당하기까지 해야 하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없겠는가?

전에 선생님에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갔을 때 이야기를 들을 때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는 신이었고 또한 인간이었다. 인간의 고통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그들을 사랑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엊그제 싸운 동수 녀석 하고도 아직 분이 안 풀리고 있는데 그는 그런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이들을 구원해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때때로 기도를 드릴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교회당 앞에 박혀 있는 십자가상 안의 그의 얼굴을 보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 몰래 의자 위에 올라가 저 십자가에 있는 예수상의 상처 부위를 어루만져 준 적도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피 흘리며 고통스러워했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측은한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조용히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신은 정말 있는 것일까? 선생님은 항상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하셨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그가 정말 신이었을까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었다. 나는 믿는다고 말로는 하지만 사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할 수는 있었다. 그의 행동을 사랑하고 그가 했던 사랑을 나 또한 하고 싶었다. 그는 낮은 자가 되고자 했고 자신의 몸을 바쳐서까지 전능한 아버지에게 사람들을 구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크리스마스는 사실 슬픈 날인 것 같아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분이 이 땅에 내려오는 날이잖아요.”

이 말에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인자하게 웃어 주시며 말을 했다.

“견우는 생일이 되면 어떻지?”

“기쁘죠. 맛있는 것도 먹고 친구들이 선물도 주니까요.”

“그러면 집에 반가운 손님이나 친척이 오면 어떻게 대하니?”

“그것도 기쁘죠. 마찬가지로 맛있는 음식도 먹고요. 아마 전날부터 기다려질 거예요.”

“예수님도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손님으로 온 거 아니겠니? 그러면 우리도 반가운 손님이 자신의 생일에 왔으니 더 기쁘게 환대해야겠지?”

“그래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니까 자신이 결국 십자가에서 고통받으며 돌아가실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거 아녜요?”

나는 선생님의 뒤편에 걸려 있는 고난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예수와 십자가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했다.

“그 덕분에 모든 인간의 죄를 씻겨주셨잖니. 그는 원수를 포함하여 세상 사람 모두를 사랑하는 이였어.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자신의 아버지 품에서 함께 있는 것이었지. 그로서는 가장 기쁜 일을 행하려고 오신 거야. 비록 그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받더라도 말이지. 그게 사랑이란다. 사랑은 그렇게 자신을 내어주는 거야.”

그때 선생님은 온화하고 따뜻한 눈빛을 보내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 어떤 포근한 비누 향이 돌았고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다.

매해 크리스마스가 그러하듯 우리는 모여서 연극 준비를 했다. 크리스마스 연극이 늘 그렇듯 아기 예수의 탄생에 관한 짧은 연극이었다. 기억하기로는 나는 말 구유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지켜보는 당나귀 역할이었다. 어떤 대사도 없었고 단지 가끔 ‘푸르릉’ 하는 소리와 여물을 먹는 동작만 하면 되었다. 성모 마리아에 안긴 아기 예수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하는 일은 단지 아기 흉내만 내면 되는 것이기에 작은 인형으로 대체되었다.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연극이긴 했지만, 사실 그 무대의 주요 역할은 아기 예수가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동방박사들이었다. 그런데도 아기가 되고 싶었던 까닭은 교회에서 가장 예쁜 아이가 마리아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못 하는 것은 당나귀나 아기 예수나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인형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부러움도 잠시 연극 내내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다짐했다. 당나귀라도 되니까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지 않은가! 연극 당일, 나는 내 목소리를 그녀가 들을 수 있게 더 크게 ‘푸르릉’ 댔다. 아마 크리스마스 연극 역사상 최고의 당나귀 연기였으리라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면서 느낀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그녀를 보는 것이었다. 그녀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교회가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그중에서도 기도 시간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기도할 때면 실눈을 뜨고 그녀의 예쁜 옆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녀의 조그만 기도 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기도를 하면서도 파르르 떨리는 눈썹, 오뚝한 콧날, 작고 앙증맞은 입술, 그리고 깨끗한 피부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바로 천사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를 바라볼 때면 예배당 안의 모든 불빛이 그녀를 향하는 듯했다. 그 불빛 안에서 그녀는 단연코 연극의 주인공인 마리아일 수밖에 없었다. 당나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였다. 그녀의 입술에서 내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고 그녀의 꽉 쥔 두 손을 풀고 내 손을 잡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당나귀는 당나귀일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녀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느 날은 그녀의 생일을 맞아 교회 아이들과 다 함께 그녀의 집으로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꽤 높은 언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덕길을 주변에는 텔레비전에서나 보았을 법한 집들이 가득했다. 아버지의 키보다도 더 큰 문들이 있었고 아주 예쁘게 생긴 차들도 곳곳에 즐비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더 큰 규모였고 그녀의 집 역시 그 근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널따란 잔디밭과 한가롭게 뛰놀고 있는 강아지였다.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올라가곤 했지만 여기는 나무들이 울창한 산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크고 널찍한 건물들이 즐비한 산이었고 그 안에 이러한 정원이 있을 줄 몰랐다.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여러 사람이 있었고 많은 이들의 기쁨 속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물론 그녀와 말을 섞을 기회조차 쉽게 얻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음식만 계속 먹었다.

연극의 연습이 마무리될 때쯤, 선생님은 성경 말씀을 해주시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당나귀를 타고 들어갔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가장 영광의 순간에 그는 멋있는 말도 아니고 비싼 마차도 아닌 단지 조그마한 나귀 한 마리를 타고 갔다. 마치 자신에게 구유를 빌려준 나귀에게 고마움을 전한 것처럼 말이다. 가장 영광스러울지 모를 그분의 탄생과 최종 단계인 입성에 함께 있었다.

세상에는 서로 간에 어울리는 것이 있고 돼지 목의 진주처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거지꼴에 명품 시계를 차고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훌륭한 사람이 나귀를 타는 것도 그와 같았다. 나귀 옷을 입을 나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역의 그녀도 서로 어울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하나의 빛이 되었다. 마리아였던 그녀가 축복받은 것처럼 나귀인 나 역시 축복을 받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난 뒤 나는 전보다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어떤 의미로는 나귀'로서' 선택받은 존재였으며 결코 세상에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와 그녀의 차이점은 단지, 그녀는 예수를 안고 나는 예수를 태우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그 생각에까지 미치자 나는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내가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난 작고 어렸지만, 한순간에 어른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더는 마리아를 위해서만 ‘푸르릉’ 대지 않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 내 가족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