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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20. 2020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가?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 시작에 앞서, 다음에 할 이야기는 성애의 방법이나 사람을 꼬시는 법에 관한 것이 아닌 좀 더 본질적인 측면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가?


근래에 연애 관련된 서적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대학에서도 연애나 남녀 관계 코칭에 관한 강의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학교에서도 물의를 일으켰던 '픽업 아티스트'는 연애 코칭의 전문가를 지칭하는 말에서 비롯되기도 했죠. 남녀가 만나고 친해지고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까지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온라인의 소셜 네트워킹에 익숙한 우리 세대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연애는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밀당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연애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하고 싶어서? 아니면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혹은 단순히 하룻밤의 불장난을 위해서?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라고 하면 가장 앞서 말한 사랑을 찾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네요. 연애(戀愛)라는 말 자체에도 '그리워할 연' 자와 '사랑 애' 자의 결합이니까요.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연애가 이러한 뜻으로 나옵니다. '연인 관계인 두 사람이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 이것이 연애라고 하네요. 연애를 하도록 이끄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할까요? 이러한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이 책 '사랑의 기술'입니다.

 

모름지기 기술은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것이 되고 계속해서 사용할 때 진정 값어치가 있습니다. 써먹지 못하는 기술은 기술이 아니라 그저 시간만 축내는 바보 짓거리에 불과할 뿐이죠.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다른 기술들처럼 '사랑' 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단순히 연예인들이 TV에 나와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의 본모습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사랑이 기술이라고 할 때에는 기술이 가진 기본적인 속성들이 사랑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론과 실천을 결합해야 하고 거기다가 지속적인 관심도 있어야 하죠. 아시겠지만 이론과 실천을 해봤다 하더라도 관심이 없다면 쉽게 잊어버리거나 알고 있는 지식조차도 소멸하고 맙니다.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 보면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때의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관심으로 비롯된 사랑일 것입니다. 사실 저 셋 중에는 관심이 제일 우선되지 않을까 싶네요. 배우고 싶다는 동기가 부여되어야만 좀 더 볼 수 있으니까요. 아마 사랑을 해본 분들은 알지 않을까 싶네요. 여하튼 사랑, 그 자체도 역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사랑에 관심이 있다면서 돈, 직업, 명예에 더 관심을 쏟죠.  



2. 사랑은 왜 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 당신에게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오. 사랑 없이 살 수 있소. 다만 그게 몹시 지루하다는 거요."


로맹 가리의 소설 '여자의 빛'에 보면 위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사랑이나 유희이고 재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인간은 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다만 사랑을 할 때 좀 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죠. 여기서 생각을 조금 확장하여 지루함을 고독이라는 말로 바꾼다면 어떨까요?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으로부터 분리, 소외되는 인간과 관련하여 탐구를 했습니다. 그의 책에 따르면 인간이 '이성'을 소유하게 됨에 따라,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선악과를 따먹게 됨에 따라, 인간의 근원적 소외나 분리에 따른 고독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에서는 그 존재의 분리로부터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이 바로 인간의 역사라고 합니다. 


과거 기독교 시대 등에서는 소외감을 종교 등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으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고독감을 완충해 줄 수 있는 장치가 그다지 없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그러한 근원적 소외, 고독감을 벗어나기 위해 권위주의에 몸을 기대게 되었고 그것을 충족시켜 준 것이 바로 나치즘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20세기 이후 세계사에 있었던 어이없고 끔찍했던 사건에 대한 원인을 소외된 인간 심리와 존재의 분리에서 찾았다면 '사랑의 기술'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갖고 태어나는 그 원인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말을 통해서 말이죠. 물론 책에서는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양한 방식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창조적 활동도 있죠. 하지만 이것은 직장의 사무원들에게는 적용되기 어려운 것이며,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아니므로 대 인간적(對人間的)인 관점에서는 사랑이 그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3. 진정한 사랑이란? 


그가 말하는 사랑은 타인을 소유하거나 소유당하려는 사랑, 혹은 복종을 요구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고립감을 극복하면서도 서로 간의 개성을 존중하는 사랑입니다. 너무나 이상적이면서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는 참으로 지켜지기 어려운 사랑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가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어렴풋하게 '이것이 사랑일 거라는 생각만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말한 사랑에는 크게 4가지 측면이 결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체크해보시고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을 점검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 보호와 관심의 측면입니다. 사랑을 하면 보호하고 싶고 관심을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보호하는 것, 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어떠한 것을 요구하는지 아는 것과 같이 그러한 측면이 있어야 한다고 하죠. 사랑하는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사소한 모습, 행동 하나까지 관심을 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는 책임의 측면입니다. 드라마 등에 보면 한 남자가 고백할 때 '사랑해, 널 책임질게!'라고 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누군가의 모든 허물까지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연인 사이뿐 아니라 더 큰 의미에서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를 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이나 안타까운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슬퍼하는 것들도 (보호와 관심의 측면도 있지만) 공동체적 관점에서 동포, 같은 민족 더 나아가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의 책임의 측면 때문일 겁니다.

셋째는 존경의 측면입니다. 누군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존경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마지막은 지식의 측면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많이 싸운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서로 간에 관심이 있어서라고 포장하며 관심이 없다면 아예 말도 안 하고 남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이 상황에서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관심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이에 발생한 어떤 문제를 타인의 관점이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만약 그 사람에 대한 지식 혹은 그가 보는 관점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지식은 나라는 관점을 벗어나 그 사람 혹은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이 화를 내거나 노여워할 때,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알수록 그 표면으로 드러나는 노여움 속, 즉 핵심 안에는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사랑을 한다면 그가 왜 괴로워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등의 이유를 알아차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을 에리히 프롬은 지식의 측면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보셨으면 알아차리셨겠지만, 그는 사랑을 단순히 단순히 남녀 간의 성애(性愛)적 사랑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과 대상을 책을 통해 규명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 대상은 다르나 종교로서의 사랑이기도 하고 모성애, 형재애적 사랑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단지 그 대상에 따라 약간의 방식에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마치 자동차 운전 기술을 배우면 1종 대형 버스나 2종 보통의 소형차나 그 작동원리는 같으나 운전 방식이나 운영 방식에는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처럼요.  



4. 사랑의 실천? 


엊그제 친한 친구와 사랑과 결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설날에 절에 갔는데 스님이 결혼하고 싶으면 절에 가서 매일 꽃을 바치고 남편이 생기면 부처님처럼 받들겠다고 하라고 했다고 제게 말하더군요. 저는 종교가 불교가 아니라서 부처님처럼 받든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매일 108배를 서방님께 하라는 것인지, 살생을 금하니 채소만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이라는 말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스님이 부처님과 같은 사랑을 의미한 것이라면 '그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아닐까 싶네요. 부처님이 세상을 그처럼 사랑했듯이 말이죠. 물론 그것은 에리히 프롬이 원하는 사랑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5. 사랑의 결실.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보면 사랑에 관해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가진 남녀가 연인이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성관계가 별개라는 관점에 있는 남자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가 그의 것이 되고 그 역시 그녀의 것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의 여자입니다. 둘은 서로 만날 때 전에 없던 영혼의 충만함을 느낍니다. 그 충만함으로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관점을 일부 버리고 그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의 그러한 성향을 일부 인정하죠. 


에리히 프롬은 현대의 젊은이들이 성적인 결합과 사랑을 혼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다소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소유, 물질주의와 결합된 성 상품화 및 성적 결합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에는 종교적, 문화적인 보수성으로 인하여 '결혼 = 성적 결합 = 사랑'이었고 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결혼과 성적 결합 등이 끝나버리는 통에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려웠죠. 


사랑의 결실은 무엇일까요? 남녀 간의 성애적, 유전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일 겁니다. 종교적, 형제애 관점에서는 주변의 가난한 자를 긍휼히 살피고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일 겁니다. 자기애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개성을 키우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어쩌면 많은 부분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유하고 소유당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다. 혹은 시기, 질투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속성이다.'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죠. 그리고 에리히 프롬이 추구하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사랑에 관한 이상적 견해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을 배우는 이유는 그것이 마땅히 지켜야 할 까닭이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틀을 제공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6. 끝으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며, 교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


어릴 적 다닌 교회에는 이러한 노래가 있었습니다. 오래 참는 것, 온유한 것, 교만하지 않은 것, 시기하지 않는 것이 어찌 사랑일까? 사랑을 해보면 아시겠지만 오래 참는 자가 사랑의 권력관계에서 을이 됩니다. 사랑의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교만하고 자신만만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성과 함께 있으면 질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게, 사랑이랍니다…… 

교회는 사랑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배웠습니다. 부처님은 자비를 베푸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오만가지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은 결코 쉬운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통해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대가 어떤 사랑을 꿈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은 부디 싱그러운 이 계절에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품을만한 그러한 사랑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언제나 멀리서 기도하겠습니다. 



꽤 오래전에 썼던 글(일부 수정)


지금까지도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하는 이상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 있는 사람은 사랑 앞에서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할 수 없으며, 그 앞에서 교만할 만큼 과시하게 되고, 또 시기 질투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감내할만한 의지가 있는지 시험을 당하기도 한다. 나는 아마, 아직까지도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나 보다.

지금까지도 내게 이 사랑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이다. 그 사랑 앞에서 수많은 괴로움을 마주하지만 그래도 아직 내게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하게 한다. 그 불꽃을 모조리 짓밟아 꺼버려도 어느 누군가 약간의 숨결만 불어넣어도 그 불씨가 이내 살아나버린다. 온 힘을 다해 다시 짓이기고 누가 볼세라 잿더미로 덮어보기도 하다가, 결국 지쳐 자포자기해버린다. 그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소리없이 뇌까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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