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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2. 2020

다시 주짓수로

나의 주짓수 도전기 19.

다시 주짓수로


다시 주짓수로 되돌아가 이야기하겠다. 내가 다시 도장에 들어왔을 무렵에는 과거 약 한 달 보름 동안 배웠던 주짓수의 기본은 다 까먹은 상태였고 몸 상태도 전보다 좋지 못한 상태였다. 휴식은 오히려 건강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었는데 그 까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꾸준히 운동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있으면서 잘못된 자세를 유지해서 그렇기도 했다. 운동할 때는 꽤 오랜 시간을 스트레칭이나 마사지도 함께 했었는데, 헬스나 주짓수 모두를 쉬게 되자 동시에 이러한 스트레칭이나 마사지도 덩달아 쉬게 된 것이다. 여하튼 주짓수의 기본 기술도 잊고 몸 상태도 전보다 좋지 못한 상태에서 주짓수를 다시 시작했다.

전과 같은 루틴으로 30분 워크아웃, 30분 기술 연습, 30분 롤링을 했다. 마지막 롤링을 하면서 매번 상대의 기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머릿속도 새하얗게 되자,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집에 돌아가서도 주짓수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 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이것을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는가? 이게 중요한 일인가? 또한, 무리해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나는 이것을 통해 선수가 되거나 혹은 메달은 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것을 실전에서 호신용으로 쓰고자 하는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마치 코인 노래방을 가는 것처럼 꾸준히 즐기면서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아니, 나는 지금껏 이것을 취미활동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인가? 문득 무엇인가가 뒤통수를 때리는 듯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지나친 열정이나 경쟁의식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과거 3~4시간을 할애하여 운동하게 됨에 따라 느끼던 부담감을 줄일 수 있었다. 취미활동에는 일말의 부담감을 느껴선 안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적 일과 삶이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하루 한 타임 주짓수를 하되 대련보다 주어진 시간에 기초와 기술 연습을 충실히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롤링은 하나의 연습이 익숙해지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만 할애하는 것으로 하면 될듯했다. 그리고 별도로 헬스장을 찾기보다 그곳에서 1시간가량을 집중적으로 타바타나 다른 체력 운동을 병행하면 2시간에서 3시간 안쪽으로 마무리될 듯했다. 이는 과거 4시간가량 할애하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였고 시간적 부담이 없는 선이었다.

사실 그전에 4시간 이상을 운동에 '과연 이렇게 하는 게 내 상황에서 적절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랐다. 그렇다 보니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거나 조금 일이 있어서 늦을 거 같으면 그 마음은 증폭이 되어 도장에 가는 걸 포기하는 날도 있었다. 또한, 롤링(대련)을 하면서 매번 지게 되자 나도 모르게 이겨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심적 부담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전보다 적게 들이고 주짓수가 내게는 노래방 가기와 같은 비교적 잘하는 좋은 취미활동 일부이며 경쟁이 아닌 자기 수양과 배움을 위한 기술 수련이라고 생각하니 매일 배우는 게 즐거워졌다. '어차피 국가 대표할 거 아니잖아? 그냥 취미와 더불어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는 거라면 천천히 가자.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우직하게!'



동료에 관하여


때마침 이때 알게 된 한 청년은 내게 주짓수 기술 수련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는데,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초보 수련생이었다. 운동 시간을 줄이고 마음가짐을 달리 한 뒤에도 도장에 있는 순간만큼은 주짓수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운동 시간을 줄인 만큼 돈이 아깝지 않도록 충실히 배우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짓수 기술은 혼자 할 수는 없는 것인 만큼 계속 쉬지 않고 기술 연습을 하고 싶어도 상대가 원치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특히 이미 해당 기술을 잘 알고 있는 선배들과 함께할 땐 계속해서 기술 연습을 요청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서너 번 연습으로는 도저히 기술을 따라가기 어려웠고 그 때문에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다음 타임의 수업을 이어서 들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친구와 연습할 땐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초보자였고 기술을 계속 배우고 연습하고 싶어 했다. 그 역시 도장에 혼자 들어온 친구였다. 우리는 부담 없이 배운 기술을 서로 물어봐 가며 계속 연습했다. 둘 다 한 타임 수업만 들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하려 했던 것도 있을 것이다.

한때 주짓수를 잘 배우기 위해서 중요한 게 무엇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뜻이 맞는 동료가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서장훈과 현주엽의 어린 시절 일화가 떠올랐다. 서장훈이 중학교 농구부에 처음 들어간 시절, 그는 농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다른 동료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기술을 배우고 키도 큰 상태였지만,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만 했었고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초보라는 점에서는 현주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둘 다 초보였기에 동료들과의 훈련을 따라갈 수 없었고 그 둘은 매일 함께 슛과 드리블 등의 기술 연습을 했다. 이러한 기초 연습이 그를 국보급 센터로 만드는데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꾸준히 자신의 목표를 이끌어나가는 데에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동료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보는 사람 혹은 임무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동료 료(同僚)자는 사람 인 변(人)에 횃불 료(㶫)자가 결합한 것으로 횃불 료(㶫)자를 살펴보면 불길이 두 번이나 타오르는 형상이다. 그 해석을 보자면 ‘밝게 빛나다’라는 의미에 사람을 더한 것으로 밝게 빛나는 사람인 '관료'를 의미하던 뜻이 이제는 함께 일하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동료란 나를 통해 그리고 그를 통해 함께(同, 같을 동) 빛날 사람의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싶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동료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깊어지지 않을까? 말하자면,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하여 동료라기보다 나를 밝혀주고 또한 내가 그를 밝혀줄 수 있을 때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진정 나를 밝혀줄 동료를 만난 듯하다. 그리고 그 역시 필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와 기술 수업 시간뿐 아니라 롤링 시간에도 기존에 배운 것들을 함께 꾸준히 복습하고 1시간가량을 도장 안에 있는 기구를 활용하여 체력 운동에 매진했다. 월, 수, 금은 타바타를 비롯한 당기기 운동 등의 인터벌 트레이닝과 상체 중심 운동에 집중했고 화, 목은 하체와 요일에 따른 여러 보강 운동을 시행했다. 목표는 1시간을 쉼 없이 운동으로 다 채우는 것이었다. 주짓수도 하는 마당에 예전처럼 근력 운동에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기에 시간이 아깝지 않으면서 과거에 준하는 운동 효과를 보려면 효율을 극대화해야 했다. 운동 중에는 새롭게 추가한 운동도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철봉에 수건을 걸고 L자로 매달리기였다. 운 시간을 줄이면서 파머스 워크를 하기가 어려워지자 대안으로 시작한 운동인데, 악력을 키우면서 동시에 상체를 비롯하여 코어를 키울 수 있는 운동이었다. 철봉운동처럼 L자 자세에서 잡아당기는 것뿐 아니라 그저 잡아당기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30초 이상 넘어가면 온몸이 부들부들 댔다.



한 번만 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한 번만 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다가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책에서는 독일 속담이라고 했다. 나 역시 이 말을 믿는다. 특히 반복 숙달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는 단지 한번 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도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그는 우리는 우리가 반복한 행동의 결과이며 탁월함은 습관에서 나온다고 했다.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 탁월함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과 생각이 아닐까 싶다. 지금 당장은 무의미해 보이고 또 때로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런 고된 일을 사서 하고 있나 싶겠지만, 그 작은 노력이 모여 나와 삶을 만드는 법이니까. 또한, 그렇게 사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보다 좋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느껴왔기에 나는 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살다 보면 슬픔이 그대 가슴에 들어와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릴 때가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공허감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모든 의미 있다고 생각한 일들을 뒤덮어 버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 또한 지나갈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는 걸.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지키려면 이런 일시적인 파도에 휩쓸려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칙을 지켜 책임감 있게 꾸준히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공허함의 위기를 벗어나게 하는 힘이 된다. 의미 있다 여긴 것들이 순간의 공허함에 중독되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늘 존재하는 것들이 있을 때 그것은 방향을 잃고 항해하는 이들의 등대가 된다. 그리고 이들은 어느덧 폭풍우가 그치고 빼앗긴 마음을 다시 찾으면 버티고 있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원래 그것들은 의미 있다고 여길 무렵에 만들어 놓았던 꽤 괜찮은 길잡이라면 필시 그러할 것이다.

물론 이게 진짜 가치가 있거나 의미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감정에 내맡길 때는 조심해야 한다. 감정은 때로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게 느끼게 하거나 혹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처럼 여기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 감정이 잠잠해질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서 자신만의 원칙과 다소 객관적인 판단 기준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시작하여 꾸준히 하게 된 것들 또한 마찬가지다.

돌이켜보면 주짓수도 일시적인 감정으로 시작한 것이다. 좋은 운동임은 알았으나 이것이 내게 좋다는 합리적인 판단도 없었고 이미 난 전에도 내 신체적, 정신적 건강 그리고 약간의 허영을 위하여 충분한 운동을 하고 있었으로 굳이 하지 않더라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어쩌면 실로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이 주짓수의 의미를 조금씩 발견하게 된 것은 운동 이후였다. 나는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어떤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았던 작은 의미들이 모여 단단한 나를 이루게 되면 공허함의 파도 따위가 와도 결코 씻겨 내려가지 않게 될 것을 믿는다. 뭐, 늘 그래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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