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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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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21. 2019

빗방울에 관한 어떤 추억.

단편 소설. (1)

오늘처럼 처마 끝에 맺힌 물방울들이 일정한 간격도 없이 떨어지던 날이었다. 그리 많이 내리지 않은 비였지만 바람이 불어 우산을 써도 그 밑으로 들어와 새로 산 바지의 밑단을 적셨다. 청년은 안 되겠다 싶어 어느 식당 건물의 처마 밑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잠시 떨어지는 비와 처마 끝에 맺힌 물방울들을,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재즈 음악과 함께 들었다. 가벼운 기타와 피아노 음이 무신경하게 떨어지는 것 같던 빗소리와 조화를 이루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는 지금보다 젊었던 어느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였다.

아마도 그날 아침이었지. 비가 이렇게 떨어지고 나는 우산을 썼고 그 우산 아래에서 너무 행복해 오히려 눈물이 났던 날이었어. 처음 겪어보는 특이한 행복감에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우산 아래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 눈물을 흘렸던 날이 그날이었어.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에서 '이렇게 행복해도 돼!'라고 생각했던 날이었지. 그 날 아침 그녀의 집에서 나와 홀로 우산을 쓰고 길을 걸었던 그 날이었던 거야. 그저 그녀를 종일 꼭 안고 잠을 잤을 뿐인데 그 따스함이 좋았던 그날이었어. 나보다 작던 체구의 그녀가 내 품 안으로 안기던 날의 아침이 아직도 생생해. 마치 세게 쥐면 터질 것 같은 사랑스러운 그 사람이 내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그 몸짓이, 손짓이, 이불속에서의 바스락거림이 좋았던 거야. 그것보다도 더 생생하고 선명하게 기억되는 건 바로 이 비였지. 그녀를 떠올릴 때 느끼는 수많은 기억의 왜곡과 좋은 것만 남은 추억들 속에서 사진처럼 기억되는 하나의 장면이지. 비가 오니 별생각이 다 떠오르는군.

바람이 좀 줄어 이제는 비교적 안정적인 형태로 내렸지만, 그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옷을 보니 바짓단과 허벅지 부근이 젖었지만, 그 안쪽까지 파고들지 않아서인지 축축한 느낌은 별로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미 주인아저씨가 와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도착하면 조금은 늦을 것 같은데 연락을 안 드려도 될까 모르겠군. 지금 가야겠어. 그러면 비를 좀 맞더라도 제시간에 늦지는 않겠지. 비도 어느 정도 그친 것 같고 도착할 곳은 그리 멀지 않으니 이제 가도 되겠어.
그는 다시 우산을 펼쳐 가던 길을 향했다. 우산 위로 느릿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는 계속해서 그를 지난날의 추억으로 인도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과거의 달콤함은 현재의 씁쓸함과 함께 섞여 추억을 강화해갔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다시 생각을 하게 됐군. 책을 덮고 나면 기억조차 안 나는데 왜 이런 기억은 이런 건 단어 하나, 소리 하나, 혹은 티끌처럼 사소한 무언가에도 걷잡을 수 없게 떠오르게 되는 걸까? 아마도 아침, 비, 그리고 음악이라는 단어는 오늘을 떠올리게 하겠군.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간’이라는 의미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네. 아! 보고 싶다. 아니 한 번만이라도 그 고사리 같던 작은 손을 잡아봤으면 좋겠어. 정말 그 손을 볼 때마다 어찌 그렇게 귀엽고 예쁜 손이 다 있던지, 마치 아기 손 같았지. 버스 안에서 무심한 척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언제나 내 손안에 들어와 있던 그 작은 손이 너무 좋아 나는 언제나 놓고 싶지 않았어. 무엇보다 뭔가 투박한 내 손 안에서 굳은살들을 손가락과 손톱으로 긁어댈 때면, 나는 이리저리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 손이 마치 따로 존재하는 생명인 것 같았고 이내 내 손에서 도망칠까 봐 마치 겁을 주는 것인 양, 살짝 쥐었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는 말 외에도 수없이 많은 교감이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런 걸 말하는 걸 거야. 말하지 않아도 수 없는 말들이 손을 통해, 눈을 통해, 냄새를 통해, 몸을 통해, 심지어 우리 주변의 사물까지도 교감이 대상이 되는 것 같아. 이렇게 교감이 된 대상들이 한데 묶어 그녀와의 사랑이라는 범주 속에 묶여버렸으니, 하나가 터지면 다른 게 동시다발적으로 터질 수밖에.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의 추억을 담아 놓은 그 마음의 창고 속에 ‘오늘’을 담아 놓았다. 마치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어느 시절이 되면 이 추억 역시 그렇게 숙성되어 달고도 깊은 맛을 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병을 불현듯 따게 되는 날, 그는 미묘한 맛 속에서 지난날의 달콤함과 씁쓸함, 행복함과 불행함이 적절하게 섞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창고 속에 저장된 수많은 추억이라는 라벨이 달린 포도주처럼.
그는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우산을 걷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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