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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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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22. 2019

저 육중하고 실로 천박한 고깃덩어리 같은…

단편 소설. (2)

저 육중하고 실로 천박한 고깃덩어리 같은 흐린 회색의 건물과 건물의 틈 사이로 달이 걸리고야 말았다. 그 틈 속에서 달빛이 그 노랑의 색을 발하고 나서야 나는 저 안에 살고 있는, 내가 한때 어여삐하던 한 여인을 떠올렸다. 함께 길을 걸을 때에는 차마 어떤 애정이 담긴 말조차 하지 못하고 서투른 농담에 곁들여 건물 사이에 걸린 저 달만을 바라보았던 나에게는, 저 달이 그녀였다. 결코, 그 거리를 좁힐 수 없던 저 건물의 틈 사이를 메워주는 것이 바로 저 달이었다. 큰 보름달은 그녀의 얼굴이었고 작은 초승달은 그녀의 눈웃음이었다. 저 달이 반쪽이 될 때면 그 달을 떼어다 그녀의 머리에 장식으로 달아주고도 싶었다. 그 빛깔은 건물에 듬성듬성 켜져 있는 창백한 불빛이 아닌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말하는 빛이었다. 이대로 있자. 이대로 달을 바라보자. 그녀가 사는 건물에 매일 달이 걸리듯, 어느덧 내 마음속에 달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달아, 그녀를 바래다주며 보았던 저 건물과 저 달을 이제는 다른 이와 함께 바라보고 있겠지. 멍충이 같던 농담도 이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있겠지. 차라리 저 건물이 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을, 육중한 고깃덩어리 같은 저 거대한 건물은 감추려야 감출 수도 없는 크기로 내 앞에 있구나. 멀리서도 보이고 먼 곳까지 달아나도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저 물체가 문득 미워지기 시작했다. 달도 미워져 차라리 구름이라도 온통 덮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구름은 저 먼 북쪽으로 떠나버린 지 오래고 살갗에 스치는 선선한 바람은 팔 언저리의 미세한 털들의 신경마저도 살랑거리도록 건들어댔다. 이날은 그토록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달이 저곳에 걸려 있어 창백한 건물마저 아름답게 만드는 그런 날이었다. 그녀를 추억하는 일 빼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날이었다. 계단에 앉아 시린 무릎을 두 팔로 감싸고 체온을 느껴보려 무릎과 팔 주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아직은 따뜻했고 그 자세는 자못 포근하기까지 했다. 그래, 이거면 됐어. 나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나직이 한 번 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면 됐지. 그렇게 중얼거려도 그녀의 웃는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야 말았다. 선명해질수록 가슴에 맺히는 허전함은 나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불쌍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달은 점차 겹겹이 쌓인 건물의 뒤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달이 떠나자 어둠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을 가로질러 봤지만, 어둠을 결코 걷어낼 수는 없었고 오히려 짙은 절망만이 더더욱 빼곡히 쌓여 눈앞을 가릴 뿐이었다. 사소한 것조차도 그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으며, 점차 나 자신도 이 공간 안에서는 오로지 깜빡거리는 눈과 중력을 지탱하는 다리의 근육만을 느낄 뿐이었다. 신체의 감각이 흐려져 마치 영혼이 붕 뜨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영혼은 저 달빛을 받아야만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었고, 어둠의 그림자 안에서는 그저 파편 덩어리일 뿐이었다. 달빛이 다시 건물 뒤편에서 고개를 내밀 때쯤, 내 신체의 파편들이 달빛을 반사해 모습을 드러낼 무렵, 빛이 다시 어둠을 몰아내고 적막감을 이불 삼아 덮을 때, 나는 저 건물이 있음을 감사했다. 독한 감기에 걸렸을 무렵, 약봉지를 보며 엄마를 떠올리고 아프지 않던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좋은 시절을 떠올리게 했으니 미우면서도 감사했다. 아마 새근새근 자고 있을 그녀가  거대한 무정물의 자궁의 속에서 나의 괴로움 따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안온함을 느끼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밉고도 고마웠다. 황무지 위에 있는 나는 이 공간을 벗어나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저 빽빽한 우림과도 같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달빛이 건물의 창틈으로 쌕쌕이 자는 그대의 얼굴을 비출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곳에 들어간 권한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살아생전에 다시는 들어가 보지 못할 저 불빛의 틈은 오로지 그대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영원히 숨어 버리고 싶어 눈을 감아버렸다.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속에서도 내 눈동자에는 흐릿한 빛들이 다소 남아 있었고 그것은 기묘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걸으며 저 높은 건물과 달과 떨어지는 벚꽃잎을 바라볼 때에도 실은 이렇게 끝날 줄 알고 있었다. 자기 예언적 실현이었다. 불행은 언제나 그렇게 자신이 등장할 시기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육중한 건물과 달은 남아 있었으나 달빛 위로 흐르던 연분홍의 꽃잎은 사라져버렸네. 내가 꽃잎이 되어 볼까. 연분홍 꽃잎을 달빛이 놓인 길 위에 다시 흩뿌려, 그대가 잊지 않고 다시 돌아 나오기를 기대할까. 숨을 한숨 쉬고 달과 건물에 가까운 곳에 내 꽃잎을 뿌릴 작정으로 한발 한발을 디뎌 앞으로 갔다. 그러나 이윽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빠앙!' 하는 경적소리에 놀라 주춤거리다가 다시 저 건물이 보이지 않도록 등을 돌리기로 했다. 저 건물은 말없이 서 있는 보살, 여신과도 같은 눈으로 나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천박한 고깃덩어리는 빛을 얻어 신이 되고 그 신의 자궁 안에는 사랑하는 나의 여인이 다시 태어날 날을 기다리며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잠을 청하고 있으리라. 나는 그곳에 닿지 못했지만, 그대는 나를 닮은 누군가를 만나 아이로, 소녀로, 여인으로, 어머니로 살리라. 나는 아이였던 그대를 알았고, 소녀였던 그녀를 좋아했고, 여인이었던 그대를 달처럼 생각했다. 수많은 기억이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들처럼 아무런 사정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망상과도 같은 기억들 속에서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된 그녀를 찾아냈다. 실은 찾아냈다기보다 내 어머니의 기억을 섞어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냈을 따름이다. '빠앙!' 어디선가 다시 경적이 울렸다. 새로운 화합물은 그 소리에 작용을 끝마치고 죽음과도 같은 상태로 사라졌다. 그 소리가 점점 자취를 감추자 한동안 건물과 내 주변에는 정적만 감돌았다. 다시 느리게 걸음을 옮기자 병든 발자국 소리가 내 귓가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오늘은 좋은 밤이었다. 이 밤의 공간에서, 저 건물 안에서 누군가는 생명의 기원을 쫓아 태고적부터 지켜오던, 새로운 아침을 은밀히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썩어가는 육신의 자취를 대지 위에 골고루 적셔 땅 위의 생명의 거룩한 양식이 되기를 바라 있을 것이다. 그런 좋은 밤이었다. 어둠의 거룩한 이불은 그런 이들뿐 아니라 나처럼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하고 그 변두리에서 어정쩡 거리는 이들조차 덮어주었다. 어쩌면 어둠으로 질식시켜 사람의 아들이 아닌 어둠의 아들로 살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잊기로 하자, 잊기로 하자. 저 건물도, 저 달빛도, 저 순결한 만월을 닮은 소녀도. 호시탐탐 내 육체를 씹어먹고 내 영혼을 탐내는 저 어둠에 제물을 바치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 세상이 나를 잊게 하자. 하지만, 알고 있다. 내 생명이 숨 쉬는 한, 내가 그 어느 곳, 우주 바깥의 어느 지점, 지구가 한없이 작아져 이제는 하늘 위의 아득한 한 점의 창백한 별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나는 그 별을 보면서 그대를 떠올릴 것임을 알고 있다. 달을 보고서도 그대를 떠올리고, 저와 비슷한 건물을 보아도 그대를 떠올릴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시간의 흐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될 어느 시기가 오더라도 문득, 어둠 속에서 저 달이 달무리를 지어내 창백한 얼굴 일부라도 비출 때쯤이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낼 것이고 그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의 보따리를 무한의 시간 속에 어지럽게 펼쳐낼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또다시 가슴을 치다가 해가 뜨면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갈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누구나 가슴에 슬픔 하나쯤은 담고 사는 존재이다. 그 슬픔은 삶의 기쁨들을 평가하는 기준이며, 행복의 첫 단계이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슬픔을 모르고서 기쁨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슬프며 또한 기쁘다. 그리고 해가 들면 슬픔은 침잠하고 마음의 파도는 잔잔해져 평온한 상태에서 기쁨이 될 일들을 궁리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 내게 달을 물어보거나 저 건물을 물어보거나 혹은 너와 관계된, 혹은 너를 떠올릴 만한 토씨 하나 던지기만 하면 바닥에 가라앉았던 것들이 다시 올라오겠지. 나는 내 의식의 호수 바닥에 널 깊이 둘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그 어떤 것을 그 호수 위에 던지기만 해도, 그 침전물들이 다시 상승하여 의식의 표면 가까이 올라올 것을 나는 안다. 하늘에도 그대가 있고, 땅 위에도 그대가 있으니, 내가 숨을 곳은 한 곳뿐이네. 그곳에 들어가면 그대 잊을 수 있으려나. 만월이 되면 그대는 지하의 주인이 될 나를 다시 부르리니, 내가 고요하게 있을 곳은 하나 없네. 다만, 어둠만이 잠깐 나의 처량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가려줄 뿐이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를 마음의 수면에 두고 함께 같은 배를 타는 것. 하늘에는 저 달이 언제나 걸려 있고, 달빛만이 비추는 그 잔잔한 호수 위에 그대와 함께 올라타 그대가 늘 언제나 내게 진지하게 보여주었던 그 눈빛, 그 눈빛이 어색해 싱거운 농담밖에 할 수 없었던, 그 눈빛에 화답하는 것이다. 끝내 모질게도 모른척 하던 그대의 마음을 가슴에 안고 평생을 저 달을 보며 살아가리라. 그리고 달을 대하는 순간마다, 긴 숨 사이로 뱉어져 나올 그대와의 한 겨울의 입김같은 추억으로, 잠시동안 허전함을 채우리라. 그 찰나는 영원하며 고통은 기쁨이리라. "빠앙!" 어느덧 그대가 아직 자고 있을 저 건물 주변으로 첫 버스의 경적 소리가 울리고 나는 잠을 청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달은 이미 보이지 않았으나,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아직 밤은, 깨어지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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