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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26. 2019

벼랑 위에서 석양을 맞이하다.

단편 소설. (3)

그리 높지 않은 벼랑 위에 서 있는 나를 보며, 그 아래에 있는 나는 아래로 뛰어내리라고 소리를 친다. 나의 다리는 이미 뛸 준비를 하고 있으며 내 팔도 역시 뛰어내리기 직전의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근대는 내 심장이었다. 심장에서 아까부터 들려오던 이 쿵쾅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 다른 소리는 들을 수조차 없었다. 아래에서 소리치는 또 다른 나의 얼굴들은 그 입 모양만 확인할 수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 감고 딱 한 번만 뛰어내리자!' 벼랑 위의 나는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을 한다. 그러나 다리는 벼랑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그러던 와중에 옆의 다른 누군가가 자신감 있게 뛰어내렸다. '이것 봐! 아무것도 아니잖아.'라며 나를 비웃듯이. 그럴수록 숨이 가빠졌다. 이 순간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졌지만, 벼랑 아래에서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나의 시선들이 느껴져, 벼랑 위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벼랑에 앉아 아래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뛸 생각을 하고 벼랑 위에 다시 서기만 하면 다리는 떨려왔고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사실 나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한 시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어떤 나는 그냥 내려오라고 한다. 또 어떤 나는 아직 뛸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아래의 어떤 나는 '병신, 머저리' 라는 입모양으로 조용히 욕설까지 해댄다. 그러나 나를 올려다보는 모두의 시선은 점차 기대에서 무관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가자, 점점 벼랑 아래의 수많은 나는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고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며 벼랑 아래 관중석에서 자리를 떴다.

모두가 자리에 뜨고 아무도 없는 벼랑 위에서 나 역시 석양을 맞이했다. 저 석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늦게 오지도, 빨리 오지도 않았다.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벼랑 옆에서 오랫동안 그 곁을 지켜오던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온 몸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목이나 멜까?'

그날의 석양은 아름다웠고 바람은 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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