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 그림자를 찾아서
이어서 또 다른 꿈이 나를 찾아왔다. “여기까지 잘 찾아왔군. 저 형상이 과연 너일까? 그래, 네 눈앞에 있는 나는 네 그림자야. 너의 꿈속의 꿈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이곳은 내가 노력으로 오래전부터 완성한 곳이야. 이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지. 어쩌면 너의 숨겨진 욕망 인지도 모르지. 나는 너이니까. 그 욕망이 실현된 장소지. 모든 사람이 널 존경 어린 눈으로 본다니 어때? 너의 세상에서는 할 수 없던 일이지? 나는 이곳에서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고 있어. 나는 모든 이들의 등대이자 길잡이니까. 너는 어떻지? 너는 누군가의 등대이거나 길잡이가 되어 본 적이 있나? 너는 부모를 보낸 이후로 너를 돌보지 않았어. 내가 떠나간 것도 몰랐지. 그런 네가 이곳에 나를 찾으러 오다니, 우습지도 않네! 그래. 네가 이곳에 올 수 있던 것은 저 위에 있는 죽은 네 부모의 요청이었지. 그래서 나는 네게 기회를 주기로 한 거야. 나를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라고. 어디 한번 잘 찾아봐. 너의 발길이 닿는 곳에서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나를 찾을지도 모르지.”
나를 닮은 존재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지? 너를 찾으면 나는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네가 날 찾을 수 있을까? 나를 찾기 전에 너의 존재 이유를 찾아. 그러면 발길이 이끄는 곳에 내가 있을 테니.”
꿈에서 깨자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 내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인가? 지금으로선 이렇다 저렇다 답변할 것이 없었다. 책임을 질만 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혹은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는 그것을 존재 이유라고 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없었다.
다음날 떠나기 전, 노인들은 나와 유상 그리고 스승님을 축복해 주었다. 그 언젠가 어떤 날처럼 태양이 뜨는 새벽이었고 새벽의 태양이 산을 거슬러 올라올 무렵이었다. 이제 우리는 저 높고 깊은 산들을 넘어서야만 했다. 여러 겹으로 층층이 둘러싸인 높은 산들의 정상은 아직도 인간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어서인지 구름으로 뒤덮여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그 구름 아래에 보이는 산 중에서 우리가 향할 곳은 뾰족한 두 봉오리 사이로 보이는 작은 틈이었다. 가파르다 못해 도저히 정복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산은 그 틈을 통해 인간에게 최소한의 관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 틈을 향하여 걸었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임에도 실제로 거기까지 향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는 험준한 산을 몇 개를 넘어야 간신히 닿을 수 있을 거리였다.
우리가 들어간 산의 모습은 마을에서 올려다봤을 때의 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안에는 토끼며 노루며 할 것 없이 다양한 동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작은 호수는 머리 위의 태양으로 인해 에메랄드빛으로 산란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이 산을 보았을 때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경외로 다가왔다면 그 안에는 더할 나위 없는 따뜻함과 축복의 기쁨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따뜻함도 어느 궤도 위까지 오른 후에는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따뜻함이 사라질 시점을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아름다움 가운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산속에서의 방심은 무의식의 세계로 날 오게 만든 한 번의 경험으로 족했다. 이곳이 아무리 내가 갖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라 할지라도 나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실 세계의 위험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 놀라운 것은 나의 무의식의 세계가 이리도 현실적이고 선명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저 태양도, 이 산도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존재들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걷는 동안 스승도 나도 그리고 유상조차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올라갈수록 기온도 떨어져 날씨도 제법 쌀쌀해졌다. 잠깐 휴식을 취하려고 산의 중턱에 앉아 가져온 물로 목을 축였다. 아래를 바라보니 우리가 떠나 온 마을이 구름 사이로 보였다. 마을도, 성상도 이 거대한 산 아래에서 보면 아주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어제까지 우리는 저 장난감의 세계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즐기며 살아왔다는 것이 문득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며칠간의 기억이 벌써 아득해지는 것 같았고 그전까지 알고 지내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오로지 이곳, 산 중턱에서 느껴지는 추위와 약간의 허기, 그리고 갈증만이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가 있었던 그곳이 낯설게 느껴졌다.
스승 역시 우리가 있었던 그 장소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잊힌다는 것은 낯설어지는 것이지. 그러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네. 그래야 새로워질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도 분명 있네. 우리가 여정을 떠나는 까닭도 바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한다네. 그림자 역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낯선 존재이기도 해. 하지만 그런데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지. 사실, 낯설게 느끼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네.”
그림자가 내 곁을 떠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당연히 언제까지나 내 발밑에 붙어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이곳에 와서도 그림자 따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도 간혹 힘들다고 느낄 때면 내가 왜 그림자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만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림자를 찾지 않았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었을 것이다. 단지 남들이 내가 그림자가 없는 것을 알고 물어보았다면 조금 불편했겠지만, 그 호기심도 잠시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그림자를 찾으려 하고 있다. 내 것에 대한 애착 때문일까? 아니면 남들은 있는데 나만 없는 것이 싫어서였을까? 단연컨대 그러한 이유는 아니었다. 아마도 내 곁을 떠나간 존재들을 붙잡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상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이 떠나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아쉬움보다도 강렬한 빛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지체할 수 없다는 강인한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그는 나보다 강해 보였다. 나보다 쾌활했으며 사교적이었으며 누구보다 따뜻한 심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저 눈빛이었다. 손발이 사라지고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버려진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저 타오르는 눈빛은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 스승의 눈이 스승에게 딱 알맞아 보이는, 온 세상을 포용할 줄 아는 눈을 갖고 있다면 그의 눈은 타오르는 열정에 알맞은 눈이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는 거울을 본 일도, 나의 눈을 제대로 본 일도 없지만, 문득 내 눈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을지 궁금했다. 저런 눈이 나에게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어린 시절에는 분명 내게도 그러한 것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유상을 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그 역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곤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여정에 힘을 북돋아 줄 것만 같은 미소였다. 그의 얼굴에는 영웅의 면모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것 같은 담대함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다시 채비하고 길을 나섰다. 좁은 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줄로 걸어야만 했다. 길은 점점 좁아졌고 우리의 걸음도 느려져 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산은 그 모습은 애정을 잃어가는 여인처럼 차츰 변덕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은 아직 강렬했다.
며칠간 산을 오르고 내렸는지 모르겠다. 해가 지면 아무 데서나 숙박을 했고 해가 뜨면 다시 말없이 걸었다. 겉보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산은 그 안을 향해 들어가자 자신의 기묘한 본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향할수록 산 사이로 향하는 틈은 멀게만 느껴지고 때로는 구름과 안개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기도 했다. 애초의 계획보다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지자 우리는 먹던 음식들을 줄여 갔다. 그렇게 또다시 며칠을 걸었다. 스승이 선두에서 우리를 이끌었고 그 뒤로 유상이 앞장서서 걸었다. 무엇일까 어디선가 쿵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양은 이상하리만치 강렬했고 온몸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만 갔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짐이 되기 싫어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러나 더 견딜 수는 없었다. 땀은 코를 타고 흘러 턱 밑으로 떨어졌다. 점점 눈이 감겼고 다리는 풀려 갔다. 내 체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운동이라도 좀 더 해 둘 걸 싶었다.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스승과 유상을 의지하며 뒤따라 가다 보면 정말 그림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으로선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내 운명은 불안함을 처음부터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는 이곳에서 나의 존재 이유를 찾으라고 했다. 내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꿈속에서 이야기한 그림자의 말이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나는 결국 어떠한 것도 찾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이들을 믿고 따르면 정말 내 그림자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몇 날 며칠의 걸음을 지속하자, 이러한 의심은 불안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쉽게 흔들리는 불완전한 믿음이었기에 나는 계속 그들을 향해 절반의 믿음과 의심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