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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14. 2020

새벽 3시에도 역시,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어느 이는 오후 3시를 일컬어

나태와 초조의 시간이라 했다.

새벽 3시, 나는 밤 잠을 청하지 못한 채 

행복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생각하고 있을까

새벽 3시의 나는 모든 나태와 초조 속에서도

이 시간의 습관과 어둠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일 뿐이다.

차라리, 어느 이가 말한 오후 3시의 그 한탄처럼

아직도 나는 행복해질 거라는 나쁜 믿음이라도 있었더라면,

온갖 나태와 초조 속에서라도 해를 보며 살아갔을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뒤척이며 한숨 쉬는 일뿐이다.

다시 불을 켜, 잡히지 않는 책과 씨름할까 하다가도

허망한 마음이 앞서, 어둠 속에서 공허를 맞이한다

지금 나는 잠들지 못하고

허기짐과 같은 공허를 지워가는 중이다.

허섭쓰레기 같은 무력감을 느끼며

무언가 남겨보는 중이다.

새벽 3시의 나는, 더 이상 행복하리라는 믿음의 가면은 벗어버리고 또 다른 나를 마주하고 있다.

새벽 3시에도 역시,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2014. 




오래전 끄적대던 글을 뒤적거리다, 장석주 시인의 〈오후 3시에는 어디에나 행복이 없다〉라는 시를 보고 쓴 글이 눈에 띄었다. 6년 전의 나는 조금 더 비참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행복이란 정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일까? 잠시 기억을 거슬러 그때의 나로 돌아가 본다. 재미있는 건, 돌이켜 보니 바로 그 시절, 새벽 3시에 이런 우울한 글을 쓰고 있던 바로 그 시절이 내게는 둘도 없이 소중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 소중한 시기를 '행복이라고 할 수 있어?'이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확답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불안과 슬픔, 그리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던 짙은 한숨조차 이제는 추억이 되어 미소 짓게 된다.      

그때, 나는 행복하길 바랐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도 행복을 바라고 있는가? 세상에 어떤 사람이 행복하지 않기를 바랐겠느냐 마는, 그것만을 위하여 달려오진 않았다. 행복이라는 것이 마치 주식 시장에서 자신이 투자한 종목의 빨간불과 파란불과도 같아서, 그것을 보는 시점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종목을 선택하느냐? 그리고 어떤 관점이나 기준으로 투자를 했느냐? 이는 인생에서 내가 선택한 수많은 것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했느냐와 관련될 것이다. 선택한 것의 가치가 성장하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 다른 것보다 더 오르냐, 덜 오르냐 하는 것은 선택 이후의 문제이며, 오로지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내가 노력한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환경의 변화와 운에 따라 정신적이거나 혹은 물질적 가치가 상승했을 때 느끼는 기쁨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행복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그때의 나는 새벽 3시에도 역시,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고 선언했지만(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언을 했을까?), 시에 나오는 그 어떤 이처럼 그것을 정말 확신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행복은 있다고 말할 때도 실로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지 그때는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 무엇이 되었든, 어떤 관점을 취하든,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불행해지기보다는 행복해지길 바란다. 자신이 어디에도 행복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든, 어디에나 있다고 믿는 사람이든 간에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태도이다. 절망 속에서도 꽃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바라보고 잠시 멈춰 미소 짓고는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비관적 현실은 직시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때의 나는,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새벽 3시의 절망감 때문에, ‘행복 따위는 어디에도 없구나…….’라고 여겼더라도, 그 감정이 결국 동트는 아침까지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해가 뜨면 조금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쓰지 못했을 테니까.     

행복에 관한 나의 기대심리는 매우 적다. 그렇기에 행복을 담는 물컵에 내 갈증을 해소해줄 약간의 물이라도 어딘가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이내 기뻐한다. 그 몇 방울의 물로 갈증을 축인 후에 다시 물컵을 들여다보는 날에는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고 여길 테지만, 나는 다시 거기에 물이 담길 날이 올 것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6년 전에 쓴 저 글에 슬프게도 나는 아직도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옅은 웃음이나마 지을 수 있다. 

당장 내일 행복조차 지금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어제 오후 3시에는 한숨도 쉬다가 오늘 3시에는 잠깐 미소도 짓는다. 그나마 이제 한 가지 바뀐 것은 아침의 뜨는 해를 만나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새벽 3시에는 깨어 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경험적으로 새벽 3시에는 행복을 담는 내 그릇에 아무것도 없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행복이 없다는 것이 내게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세상이 내게 비참함을 줄 때는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고 여기면서도, 다음날 같은 시간에 누군가 내게 값진 미소를 지어주기라도 한다면,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며 잠시나마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아마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새벽에는 분명 낮에 있던 이 일을 되새기며 그제야 행복했었다고 평가도 했을 것이다. 그래. 결국, 행복은 존재가 아니라 평가일 따름이다. 

해가 기울고 조금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오후 4시에 가까워진, 바로 지금 이 순간! 너는 행복한가? 지금 당장, 행복을 떠올리면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으니 모르겠다. 다만, 내 삶 전체 혹은 과거 어느 시절을 떠올리면 그 의미들은 내게 좋은 기억을 주니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행복할 것인가? 그것 또한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오후 3시를 넘어 4시에 이르는 시간의 점들의 집합 위에서도 의미가 될 것들을 분명히 만들어갈 것이다. 기록할 수 있는 의미들의 페이지를 채곡 채곡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 것이다. 그 책의 이름은 적어도 ‘불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2020년 6월의 어느 오후 4시 즈음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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