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스승과 대화하다

연재소설 - 그림자를 찾아서

by Chris

“스승님, 언제부터 제가 이런 인간이 되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실패작인 것 같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도 해 봤어요. 살면서 어떤 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처량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내가 스승이라 부르던 노인은 잠자코 귀를 기울여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아니에요. 사실 저는 알고 있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저라는 사람이 결국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요. 그리고 이런 삶을 어쩌면 스스로 원해 왔던 것 같기도 해요. 나라는 사람은 결국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며 그렇게 살아가리라는 것을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실패작이었던 것일까요? 저쪽 세상에서 변변치 않은 집 하나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남들처럼 변변한 직업이 있거나 혹은 행복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어요. 가지지 못한 삶에서 심지어 이제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기까지 했고요. 그림자가 그러했고 잊지 말아야 할 기억들이 그러했어요. 잊을 수 없다고 여긴 것들을 차츰 잊어버렸어요. 아니, 어쩌면 일부러 기억하고 싶지 않고자 했던 것 같기도 해요. 가진 게 없었으니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도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래요. 그 이후로는 잡히지도 않는 무형의 기억을 떠올리기가 괴롭거나 때로는 귀찮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오랜 시간 흘러 자연스럽게 잊힌 것도 있었고요.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흐려져 가는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다지도 아쉬울 게 없게 되어버리기도 했고요. 모든 게 귀찮았어요. 놓치게 되는 것, 잊히게 되는 것들에 미안해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때부턴 그런 것도 없었어요. 당연히 기억할 줄 알았던 이름들이, 골똘히 생각을 쥐어짜야만 간신히 떠오를 때도 있었죠. 머리 아파도, 짜증이 나도 오래된 기억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을 분류했어야 했어요. 지저분한 방을 청소할 때처럼 오랜 기억들의 잡동사니 가운데서 분류했어야만 했어요. 모든 것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질러진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버려버리고 홀가분해지고 싶었어요.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 순간에 담긴 가르침만큼은 반드시 기억했어야 했어요.”

정리정돈을 하지 못하는 나는 결국 기억조차 제대로 분류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소중한 것 중에서도 정말 남겨야 할 것들조차도 남기지 못한 벌거숭이가 되어버렸다. 정말 소중한 것들에 대한 분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여 소유하지 못하는 것들이 정말 소중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잊고야 말았다.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고 다 망각하게 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자기 위안을 하면서,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라는 자조 석인 위안을 하면서. 운명의 여신의 실타래 아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결국, 다 버리고 말았다. 문득, 그림자는 어쩌면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버릴 때 함께 버린 것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웠겠구만.”

“…… 네. 외롭고 공허했어요.”

“고독은 어둠과 같은 것이라네. 모든 것을 시야에서 가려버리지. 그것은 눈을 멀게 함과 동시에 다른 감각들을 좀 더 강하게 일깨운다네. 특히 어둠 속에서 밝혀지는 오래된 기억의 환영은 더욱 강하게 빛나는 법이지. 누군가는 그 환영이 나타난 의미를 깨닫고 어둠이 사라져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반면, 대체로는 그 환영이 결국 현실에서는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어둠 속에서 계속 머물러 있으려 하기도 한다네. 그것이 심해지면, 평생 고독과 어둠 속에서 도망쳐 지내게 되기도 하지. 물론, 자네만 이러한 고독과 어둠에 잠겨 있는 건 아니라네. 이 공간은 그런 심연 속에 묻힌 이들 중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지. 그대는 세상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친구야. 물론 실제 세상의 여러 영향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지만, 정말 그대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는 친구지.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결코 올 수 없었을 걸세. 그대는 불행한가?”

나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승의 대답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저는 불행한 걸까요?”

나는 도리어 그에게 물었다.

“오! 가련한 친구야. 그러나 그대가 가련하기에 나는 그대를 따라 그림자를 찾으러 나설 수 있는 거라네.” 그는 모호한 말로 내게 말했다.

‘나는 불행한 것인가?’

지금은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도 불행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는 지금 무감각하게 시간만 축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무언가를 계속 찾고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오히려 과거 현실 세상보다 만족스러웠다. 그때에는 내가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었다. 죽음과도 같은 지금의 상태가 오히려 살아있는 거 같았고 그림자가 있던 그 시절이 내게는 죽음과도 같은 상태였다.

“스승님, 저는 아무것도 이루지도 못하고 이대로 나이만 축내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대가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는 것은 거울을 보고서 주름이 하나 더 늘었다고 느끼는 것만은 아니겠지. 정말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는 건 더는 꿈을 꾸기보다 현실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일 거야. 예전처럼 ‘한번 해보자!’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겠지. ‘내가 원하는 건 이것이 아닌데…….’ 라며 생각할 수도 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면서 그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는 자신을 보면서 서글퍼지기도 할 걸세. 현실 속에서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보면 나이를 먹고 곧 자신감을 잃게 되지. 그 무력한 삶에서 발버둥 치지 않으면 결국 그렇게 살뿐이네. 아주 간혹 운이 좋은 사람이어야 그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그는 무슨 생각이라도 하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보게, 그대가 주름살이 아니라 어떤 꿈이 사라져서 늙어버렸다고 생각하거든, 발버둥 치게. 그렇게 해봐도 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대의 사소한 발버둥이 목적 없는 삶, 변함없는 삶을 조금이라도 뒤흔들어 빠져나갈 틈이라도 만든다면 그게 그대에게 역전의 기회를 줄지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처음부터 의미 있는 것은 별로 없네. 무의미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을 찾으려고 꾸준히 발버둥 칠 때야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되는 것일세. 생각해보면, 자네가 그림자를 찾고자 어떻게든 노력했으니 우리가 이렇게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자네는 자네 스스로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달았고 방법을 찾으려 발버둥을 쳤네. 때로는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살아가지. 그저 살아가다가 소중한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조차 잊어버리고 살게 될 때가 많다네. 그림자가 자네를 떠난 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네. 그대가 더 늦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어떤 것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의지에 앞서 있어야 할 것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유상은 자신도 궁금한 듯 물었다.

“그것은 충동일세.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최초의 마음이지. 이 꿈의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에너지이기도 하지. 모든 것을 다 충족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상태의 충동은 한 인간에게 악덕을 만들기도 하지만, 미덕을 만들기도 한다네. 결핍이 복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에 관한 충동을 만들고 충동을 이어나갈 의지를 만드는 미덕을 또한 만들기 때문이지. 필요는 충동을 일으키며 그것이 그대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 헤매게 했듯이 말일세.”

“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공허했습니다. 내 인생의 이야기라 할 만한 게 없었죠. 그리고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매일 똑같은 삶을 살다가 죽을 것 같은 예감, 어린 시절에 어떻게 살겠다고 구체적으로 꿈꾼 것도 없었지만, 결국 제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지도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여정이 좋습니다. 생각해보면 어쩌면 제가 그토록 바라고 있던 것일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좋아! 이렇게 낯선 곳을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거기에 나 자신이 우리 마을에 필요한 사명을 띠고 여행을 하는 거니까.”

유상도 웃으면서 내 말을 거들었다.

“그대는 행복한 적이 있는가?”

그는 갑자기 내게 물었다. 그 대답에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는 이제부터라도 무엇이 그대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네. 행복이라는 것은 어떤 선택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지. 그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기준인 셈이야. 그 기준을 고려하여 행동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사소한 행동 이후에 그대가 그 행복이라는 기준으로 의미를 분류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이 될 거라네. 그것이 그대를 남다른 인생의 이야기를 가진 존재로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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