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주말 친구와 동네 간식을 사 먹으러 샌드위치 가게를 갔었다. 주문을 하고 대기가 필요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뒤로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이가 샌드위치와 우유를 거의 다 먹어가던 쯤이었다. 다 먹고 어디에 버려야 할지 몰랐는지 점원에게 물었다.
"어디에 버려야 해요?"
"검은색 쓰레기통에 버리면 돼요."
점원이 알려줬는지 아이는 휴지통을 찾았고 손으로 뚜껑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열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얼굴로 휴지통을 살폈다. 그러자 "밟으면 돼요"라는 점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휴지통 아래를 살폈고 휴지통 뚜껑을 여는데 성공했다.
열린 휴지통을 앞에 두고 망설이듯 살피는 모습이었다. 휴지통 내부는 분리수거가 가능하게 나눠져 있었고 어린이는 어디에 버려야 할지 살펴보는 듯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비닐봉지를 어디에 둬야 할지 손에 들고 고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말로 알려주던 점원이 나타나 "제가 버릴게요"라며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건네받았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에이 시간을 좀 주면 저 친구가 알아서 했을 텐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린이를 마음으로 응원하고 모습을 지켜보게 된 데는 <어린이라는 세계>의 한 문장이 유난히 콕 박혔기 때문이다. 첫 챕터에서 새 운동화를 신고 온 현성이 어린이의 일화가 그렇다. 풋살화를 샀는데 묶는 게 복잡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저자는 어른이 되면 어려웠던 일이 쉬워지기도 한다며 독려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성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작가는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라고 책에 썼는데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인데 그걸 못 참고 빼앗아 처리하던 어른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모습이 익숙했기에 주변에 어린이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나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경험이 무척 중요하다. 배려받은 사람이 배려할 줄 알고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 주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저자도 이런 부분을 알고 있는지 독서교실을 하면서 어린이의 겉옷 시중을 드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책을 읽어 갈수록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들을 마주했다. 이런 생각은 어디서부터 쌓였을까. 그 근원지를 찾아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나의 어린 시절을 만나게 됐다. 어린 시절의 어른의 태도가 경험으로 쌓였고 그런 대우가 당연하다고 순수하게 받아들인 나를 만나게 됐다. 그렇게 경험이 무의식으로 켜켜이 쌓여 나 역시도 어린이를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최근 어린이들이 학대받는 뉴스를 볼 때마다 염려된다. 당연히 옳지 않은 일을 경험했는데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없는 어린이가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까 봐.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어른을 만나게 된다. 그 안에는 유년시절의 어린이가 함께 있다. 태도나 언행을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려질 때가 있다. 예전에 지인에게서 "곱게 자란 테가 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냐.'는 울화가 치솟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칭찬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대우를 잘 받고 잘 컸다는 말처럼 느껴 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