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을 최근 시작했다. 시작했다기보단 계정을 열고 분위기를 살폈다. 요즘은 페북보다 인스타그램이 대세라길래. 나이가 먹어가니 SNS에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점점 꺼려진다. 이유는 모르겠다. 괜스레 슬퍼진다.
가끔 싸이월드를 하던 시절 감수성 돋는 글을 떠올리며 이불킥을 한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접한다. 20대 초중반 다들 그렇듯 싸이월드를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불킥을 한다는 사람들은 신문물에 부적응 현상을 보이는 기성세대 또는 꼰대가 되었거나 감수성이 메말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먼저 동물 관련 계정들을 여러 개 팔로우했다. 한 동물 보호 단체에서 보호하고 있는 개 한 마리를 본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렁이다.
몸 전체는 옅은 갈색이고 코와 입 주변은 까맣다.
사실 시골이라기보단 개농장에서 보는 외모를 가진 개다.
한국에서 전형적으로 시골 개 또는 식용견이라 불리는 품종 (breed) 아닌 종류의 개다.
이런 개들은 주로 시골 토종 견과 도사견을 교배시켜 식용견에 적합한 크기로 개량한 종들이다.
한국에서는 어느새 식용견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품종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주로 개농장과 식용견에 대한 르포 사진이나 영상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인간은 지난 수백 년간 사용 목적과 기호에 맞게 개의 품종을 개량해 왔는데, 천년기념물 한국의 토종견 진돗개에 맞먹는 새로운 품종을 개량해 내고야 말았다.
구글에 '개고기'를 영어로 검색해보면 (dog meat) 위키피디아에 관련 글이 자세히 나온다. 친절하게도 한국에서 식용견으로 사용되는 누렁이 (Neurongi)라고 소개해 준다.
The Nureongi are mongrel dogs with yellowish coloring often used as source for dog meat in Korea.
동물 보호 단체에서는 그 누렁이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다복이라고 한다.
식용견이나 누렁이가 아니라.
세상에.
오물이 뒤범벅한 지저분한 개농장의 뜬장에 사육되는 식용견에게 이름이라니.
좁은 철망을 벗어난 개 한 마리가 사진 속에서 나를 쳐다본다.
그 눈빛이 너무 서글프다.
갑자기 울컥한다.
지금 내 귀의 이어폰에는 슬픔이나 감수성과 관계없는 록음악이 흘러나오는데도 말이다.
그 개의 순진무구한 눈빛은 수영장이 딸린 미국의 대저택 안의 주방 바닥에 앉아 보호자를 쳐다보는 황금빛 털을 휘날리는 골든 리트리버와 다르지 않다.
마치
"나는 잡아 먹히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대답한다.
"미안해. 너는 몇몇 사람이 (아니 꽤나 많은 사람이) 먹기 위해 만들어 낸 종이야"
스크롤을 하나 더 넘기면 'Golden Retriever Club'에 팔로우한 게시물에 골든 리트리버가 산타모자를 쓰고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이 보인다.
누군가는 말한다.
'애완견' 자체를 없애라고.
동물은 자연 그래도 살게 내버려두고 인간 사회에 들이지 말라고.
자칫 잘못 들으면 동물 복지와 보호에 꽤나 신경 쓰는 사람으로 보인다.
결코 아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동물과 함께 사는 존재이다. 도시의 콘크리트 속에서 화려한 LED 조명 가운데 스마트폰을 들고 살아도, 우리의 눈에 동물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동물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개는 오랜 역사동안 인간의 생활 속에 깊숙히 들어왔다. 만 오천년의 유대 관계를 지금에 와서 당장 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것은 무엇보다 무책임이다. 인간이 개를 사용 목적에 따라 개량하며 동물을 학대한 행위를 지금에서라도 인식했다면,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책임 있는 행동이다.
같은 하늘 아래 누군가 목적에 따라 '식용견'을 만들어 냈다 하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반려견'으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동물과 인간 사이에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