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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개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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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잇독 Dec 13. 2018

#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더라면

이별이 무뎌졌을까

헤어짐이 언제일 것을 알았다면 좀 더 나은 이별을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예고 없는 헤어짐이 더 짧은 이별의 슬픔을 선물한 건 아닐까. 혹여 알았다 해도 목적지는 같았을 텐데, 알았다면 이별을 막거나 늦출 수 있었을까. 막는다고 영원히 행복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해야 잘 떠나보내는 건지 몰랐다.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개들은 항상 나에게 예고 없이 떠났다. 어린 나이에 온몸이 잠길만큼 쌓인 눈 속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던 바둑이는 학교 갔다 돌아오니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버지께서 다른 집에 파셨다고 하셨다.


뒷마당에 있던 또 다른 개를 아버지께서 파신다는 말에,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을 함께 하고자 그 친구와 트럭에 함께 오른 기억이 난다. 겨울이라 케이지도 없이 트럭 화물칸에 실을 순 없어서 트럭 앞좌석 바닥에 개를 태우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어두컴컴한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겨우 20분 남짓이 헤어짐을 위한 시간으로 주어졌다. 불행 중 다행인지 도착한 장소는 개농장이 아닌 돼지농장이었다. 돼지 농장이라고 해서 시골 개의 운명이 얼마나 달랐겠냐마는 캄캄한 밤 다른 개들의 소리를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린 나에게 위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병에 걸려 죽은 개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고 야외에서 키우면 개 홍역 (Canine Distemper)이나 파보바이러스 장염(Parvovirus Infection)에 걸리기 일쑤였다. 요즘은 반려견에게 반드시 종합 백신을 맞춰야 하고 그로 인한 예방 효과가 뛰어나지만, 그러한 전염성 바이러스 질환은 치명적이다.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이 다가온 이별의 시간은 언제나 짧았다.


삶의 길이와 관계없이 마지막은 언제나 슬픔이 동반되지만 내게는 오랜 시간 함께 한 기억을 주고 떠난 개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함께 한 행복한 시간이 길면 슬픔도 길기에 오히려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암시로 애써 슬픔을 회피할 뿐이다. 어차피 병에 걸려도 치료라는 것을 해볼 기회도 없었기에 짧은 시간의 고통으로 삶을 마치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도 좋았을 것이라는 억지 위로를 한다.


한국에서도 반려동물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성행한 사업이 반려동물 장례업이었다. 피할 수 없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을 최소화하는데 유의미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그마저도 하지 못한 자는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펫로스 증후군 (pet loss syndrome/grief)이란 단어는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잃었을 때 겪게 되는 상실감과 슬픔이 얼마나 크고 괴로운 일인지에 대해 표현해 준다. 그때 누군가 내게 이런 것이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려줬더라면 어린 나이에 홀로 슬픔을 감내하는데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현재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직장 동료나 친구가 반려동물을 잃게 되면 당사자에게 위로의 카드 (sympathy card)를 써 준다. 반려 인구 1000만이라 불리는 2018년 우리나라 사회에서 이런 장면은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 반려동물 동호회가 아닌 곳에선 여전히 '유난 떠는 볼썽사나운 행위'로 인식되지 않을까 우려섞인 예상을 해본다.

 

나는 현재 어떤 반려동물도 키우고 있지 않다. 오늘도 창밖으로는 평화로이 사람과 발을 맞추어 산책하는 개들을 본다. 반려견의 천국이라 불릴만한 미국에서 개를 키우는 날이 올까 라는 생각을 문득문득 한다.


아직은 여러 가지로 준비가 덜 되었다고 느끼기에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반려동물과 개인적인 내 일상을 공유하고 있진 않다. 내 삶의 일부를 차지했던 생명의 기억을 간직하고자 그저 이렇게 글로나마 기록할 뿐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난 성인이고, 내가 운전을 할 수도 있다. 여유롭진 않아도 돈을 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못한 채 무기력하게 떠나보낸 그들의 삶의 시작과 끝을 기억하면, 한 생명의 삶과 죽음의 무게를 내가 오롯이 책임지기가 여전히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상투적인 표현으로나마 오래전 내 곁을 지나간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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