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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잇독 Aug 27. 2018

개미 한 마리 못 잡는 남자

잡는다는 말은 죽인다는 말과 같이 쓰인다. 엄밀히 말하면 못 잡는 건 아니다. 가능하면 '안' 잡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벌레라도 가급적이면 죽이고 싶지 않다. 개미 한 마리라도, 살아서 움직이는 한 생명체를 나의 힘과 인간이란 위치를 이용해 발로 밟아 짓이기는 것은 영 끔찍한 기분이고 싫은 감정이다. 거창한 이유 따윈 없다. 죽이고 싶지 않다는 감정적 반응, 느낌적 느낌이 먼저였고, 그다음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왜 죽이는 것이 싫을까 라고.


많은 여자들이 그렇듯이 내 아내도 벌레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벌레라는 생물체가 가지고 있는 그 생김새도 싫어하긴 하지만, 집 안에 들어오는 것에 엄청난 거부감을 보인다. 벌레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기보단, 깨끗한 집을 더럽히는 것이 더 싫어서라고 나는 추측을 해본다. 개미나 거미를 싫어하긴 해도 밖에 있는 개미집이나 거미줄을 파헤치거나 찢어버리면서 개미떼나 거미를 죽이거나 하진 않기 때문에, 자연과 식물을 사랑하는 아내가 곤충이란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집 안에서 파리, 모기, 개미, 거미 등 벌레 한 마리라도 발견될 시에는 난리가 난다.


문득 고등학교 학창 시절, 같은 반 여학생이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교실을 급습한 벌레 한 마리 때문에 조용하던 교실을 비명소리로 채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친구도 자연 상태의 벌레를 혐오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 몸에 달라붙거나 내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을 것이다. 자연을 멀리한 도시에서 자란 현대인으로서, 단지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낯선 존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 아름다운 꽃과 풀들 속에 혐오스런 곤충들이 득실거린다는 것이 우리의 이미지 속엔 없다

아무튼 집에서 벌레가 발견될 시 나는, 야구 선수의 동체시력보다 더 빠른 눈 놀림으로 파리채, 휴지, 또는 벌레를 잡을 도구를 찾아내야 하고, 농구 선수가 상대 수비수를 벗겨내기 위해 발휘하는 순간적인 퍼스트 스텝보다 더 빠른 몸놀림으로 벌레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아내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는 스스로 순발력이 비교적 좋은 편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벌레를 잡을 때는 굉장히 굼뜬 모습을 보인다. 그런 내 모습에 어느 정도 포기한 아내는 웬만하면 본인 스스로 해결을 한다. 무책임한 남편이란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변명을 대보자면, 항상 그렇게 굼뜬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해야 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그것을 실천하긴 하지만, 그 일을 행할 때의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도 살면서 벌레를 많이 죽였다. 나도 바퀴벌레는 싫다. 집 안에 출몰하는 개미떼도 싫다. 하지만 그 '싫다'는 반응은 감정적 반응이기보단, 어쨌든 집이란 건물 안에서 위생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벌레를 집으로부터 떨어뜨려한다는 필요에서 나오는 이성적 반응임에 더 가깝다. 설령 그런 생물들을 박멸해야 할지라도, 인간이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이루어 놓은 콘크리트 건물에 다른 생물체가 들어오는 것에 대한 살생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있긴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기적인 결론으로 자위할 뿐이다.

모던 스타일의 집에 개미, 거미와 공존하는 것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일주일에 한 번 수거하는 쓰레기통을 길 가에 내어 놓기 위해 치웠더니 바닥에 숨어있던 개미 한 마리가 우리 집 차고로 진입하려는 시도를 했다. 외부 생물체를 집으로 들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미의 면적보다 수백 배는 더 큰 내 신발로 밟아서 짓이겨 버리는 것이 더 쉬웠겠지만, 개미의 길목을 막고 진행 방향을 틀게 해서 밖으로 나가게 한 후 문을 재빨리 닫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어차피 문틈으로 들어오려면 얼마든지 올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란 거대한 존재가 쓰레기통을 갑자기 치우는 바람에 개미 본인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무의식 중에' 들어가려 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두면 그들의 집이 있는 야외의 잔디밭을 더 선호해서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으로 나는 기대한다.

숨은 개미 찾기: 아스팔트와 잔디밭 사이에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들은 오늘도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다

개미 한 마리 내가 밟아 죽인다고 세상이 악독하게 변할까? 갑자기 생태계가 파괴되고, 자연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얻기 위해 내 카드에서 지불되는 돈이 급증해서 카드 빚이 순식간에 쌓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밟아 죽임으로써 당장에 순간적인 희열과 기쁨을 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뜩이나 출근하기 싫은 월요일 아침, 직장 상사의 얼굴을 생각하며,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상쾌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의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죽여야 되지 않아도 되는 생물체를 일부러 죽이는 것은, 인간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을 상실해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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