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이병현 Sep 01. 2020

강물에 던진 사랑

*이 글은 백화 형식인 풍몽룡의 «강물에 버린 사랑»을 문언 형식 중에서도 지괴소설로 변형한 패러디물로, 특히 중간에 모 블로거가 번역한 «요재지이»의 이야기들(<사랑찾아 날아간 혼> 등)의 몇몇 문장을 따와 활용했음을 밝혀둔다. 번역문 링크: https://kimhogu.tistory.com/m/31


錦史(금사)
壇上月明夜 장충단 달 밝은 밤 (단상월명야)
精靈說往情 혼령이 지난 날 말하네 (정령설왕정)
早知今日事 오늘 일 일찍 알았더라면 (조지금일사)
當日死還輕 그 날 죽었으면 좋았을걸 (당일사환경)

북경에 사는 이갑은 태학생으로 본래 절강성 소홍현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가문의 장남으로 어릴 때부터 과거급제를 목표로 하였으나, 거듭된 낙방에 지쳐 심신이 상한 터였다.
하루는 이갑이 문중친구와 함께 어느 기방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곳엔 당대의 명기라 소문이 자자한 두미가 있었으니, 두미는 항렬이 열 번째라 흔히 두십낭이라 불렸다.
때문에 기방 앞엔 늘상 벼슬께나 한다는 집안의 돈푼께나 있다는 자제들이 줄을 서 진을 치고 있었고, 두십낭과 만나기 위해 돈 밝히는 기생어미에게 슬쩍 돈을 찔러주는 일도 흔했다.
이갑은 본래 화류계 출입 경력도 많지 않아 두십낭에 대해 다만 궁금증을 갖고 있는 터였다. 친구는 이갑을 놀리며 말했다.
“두십낭을 본 자들이 모두 두십낭에 빠져 자신들의 재산을 탕진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데, 자네는 탕진할 재산도 거덜 낼 집안도 마땅치 않으니 어디 자네를 거들떠나 보겠는가?”
이갑도 그가 자기를 놀리고 있는 줄을 알았다.
하지만 그 역시 두십낭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으므로 흔쾌히 얼빠진 청년들 사이에 끼어 기방을 엿보았다.
먼발치로 어떤 여자가 천천히 부채를 부치는데 문밖의 소년들이 마치 축제날 행렬처럼 그녀를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모두 입을 모아 재잘거렸다.
“저 여자가 분명 두십낭이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그녀는 과연 두십낭이었다.
이갑이 찬찬히 뜯어보았더니, 두십낭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말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잠시 후 기방 밖을 둘러싼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늘어나자 두십낭은 소란에 못 이겨 군중을 흘끗 둘러보았다. 그때 두십낭과 이갑의 눈이 마주쳤는데, 두십낭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둘러서서 두십낭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넋이 나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인물을 품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들 미친 듯이 지껄이고 있을 때 오직 이갑만이 홀로 아무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보니, 이갑은 여전히 머물던 그 자리에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것이었다.
친구가 가자고 불러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잡아끌면서,
“자네 혼이 두십낭을 따라갔는가?”
라고 놀렸지만,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곧바로 침상에 드러누워 온종일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이갑은 매일 밤 꿈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여자에게 이름을 물어보니,
“나는 두미杜尾요.”
라는 대답이었다.
그는 내심 이상하게 여겼지만 이 일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갑은 자리에 누운 지 사흘째가 되자 기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며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호흡이 가늘어졌다.
소문을 들은 고향친구 유우춘이 찾아와 말했다.
“자네가 기껏 상경해 낙방만 거듭하더니, 상사병에 빠져 매일 같이 누워만 있다고 하니 이럴 거면 차라리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낫겠네.”
이갑은 그 말을 듣고선 그간의 사정을 말해 주었다. 이갑의 말을 듣고 난 유우춘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두 사람은 그날 처음 본 것인데 요술을 부린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래도 이갑이 한사코 주장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기방에 찾아갔다.
유우춘이 기방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두십낭이 기방에 나와있었다.
웬일인지 그를 본 두십낭이 먼저 말을 걸었으니 좌중이 놀라 수군거렸다.
“혹시 이갑이라는 분의 고향친구 유우춘 선생이 아니신지요?”
유우춘이 몹시 놀라 그렇다고 대답하자 두십낭이 말했다.
“실은 선생을 꿈결에 본 것 같아 여쭤본 것입니다. 제가 요새 매일 밤 꾸는 꿈이 있는데 어젯밤엔 거기에 선생도 나오시더군요.”
그러고선 그녀는 이갑과 유우춘이 나눈 대화의 내용, 이갑의 방 안에 있던 화장 도구나 경대, 문갑 같은 가구들이 무슨 색깔, 무슨 물건이라고 줄줄이 꿰었는데 사실과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
유우춘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놀라다가 두 사람이 첫눈에 서로를 사모하게 되어 꿈에서나마 서로를 만나게 된 것이 아닌지 짐작했다.
과연 짐작대로 이갑은 그 뒤로도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자 마치 뭔가를 잊어버린 것처럼 자나 깨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기만 하였다.
그는 늘 기방 근처에서 서성이며 두십낭의 모습이 드러나기만 기다리고 한 번만이라도 그녀와 마주치길 희망했다.
반대로 두십낭도 새 손님을 받지 않고 단골은 끊어버리니, 그 뒤로 기방에도 두문불출하여 기생어미의 속을 끓게 만들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다만 꿈에서만 그리워하는 세월이 1년이 흘러, 그 모습을 홀로 지켜보던 유우춘은 큰 결심을 하고는 기생어미를 찾아갔다.
“두 사람의 깊은 정은 이미 서로의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이제 제가 여기 삼백냥을 가져왔으니, 차라리 이 돈을 받고 새로운 기생을 구하는 것이 피차 이득이 아니겠습니까?”
기생어미 역시 두십낭의 고집에 골치를 썩이던 차였다. 그러나 두십낭은 당대의 명기, 이대로 보내는 것은 손해가 막심하다 생각해 퉁명스레 대꾸했다.
“두십낭이 1년 간 벌어다 줬을 돈이 이미 삼백냥은 족히 넘을 텐데, 고작 그것만 받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 손해요.”
유우춘이 기방에 찾아온 순간부터 은근히 귀를 기울이던 두십낭이 끼어들어 말했다.
“그렇다면 얼마를 줘야겠습니까?”
“은자 천 냥은 받아야하지 않겠니?”
“그렇다면 드리지요.”
두십낭이 선뜻 칠백냥을 꺼내와 책상 위에 쏟아 놓으니 기생어미는 얼이 빠져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유우춘이 크게 기뻐하며 시름시름 앓고 있는 이갑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갑은 유우춘에게 고개를 숙이며 탄식하길,
“내 자네에게 빚을 졌으나 갚을 길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그러자 유우춘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은자 삼백냥을 마련하여 온 것은 자네를 위해서가 아니라네. 두십낭의 진심이 나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라네.”
이리하여 기방을 나온 두십낭은 이갑을 맞이하여 얼굴을 맞대니 그들은 마치 한세상이나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상봉을 기뻐했다. 두십낭은 서생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저는 죽음을 맹세하고 당신을 따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밤이 되면 절대 저를 불로 비춰보지 마세요. 그 뒤에 당신이 급제한 뒤 고향에 내려가게 되면 그때는 비춰봐도 됩니다.”
이갑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로부터 이갑의 몸은 점차로 회복되었다. 낙방만 거듭하던 과거에도 마침내 3년 뒤 급제를 하였으니, 두 사람은 고향에서 이갑의 부모님을 뵙고 혼례를 허락받고자 했다.
이갑과 두십낭은 금의환향에 올라 노하에 도착하였다. 때마침 과주에서 예까지 일보러 왔다가 돌아가는 배가 있어 뱃삯을 흥정하고 난 다음 배에 올라탔다.
다음 날, 보름달이 환히 뜬 밤 배는 강을 가로질러가기 시작하였다. 이갑은 뱃전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십낭은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갑은 문득 수년 전 두십낭이 한 얘기가 기억났다. 불로 비춰보지 말라고는 했지만 오늘처럼 달빛만으로 훤히 밝은 밤이라면 괜찮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미 과거에도 급제했으니 조건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생각했다. 이갑은 조심스레 이불을 들춰 두십낭을 보았다. 놀랍게도 허리 아래에 큰 꼬리가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두십낭이 깨어나 말했다.
“저를 저버리셨군요. 곧 인간이 될 수 있었는데. 어째서 고향에 도착하길 기다리지 못하고 저를 비춰 보셨나요?”
이갑이 거듭 사죄했지만 두십낭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제 정체를 들켰으니, 부부지간의 의도 영원히 끊긴 것입니다. 저는 이제 한갓 여우로 돌아갈 뿐. 평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이대로 짐승이 되느니 인간으로 죽겠습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두십낭은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윽고 상심에 찬 이갑도 물 속에 뛰어드니 강물 위엔 서늘한 달빛만 남아 물거품을 비췄다.

이사씨는 말한다.
마음이 있다면 두 사람은 반드시 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기다림이 없다면 어찌 그 끝이 좋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보면 지나친 조급함이야말로 진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문잡지 『한편』 리뷰가 민음사 블로그에 실렸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