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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Sep 22. 2024

사랑의 출발점

콩깍지의 불편한 진실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명확히 다른 행위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연 현상에 가깝고, 사랑을 하는 것은 철저히 내 의도를 머금은 행동인 것이다. 대개 모든 일들이 그렇듯, 나의 의지와 목표가 설정된 행위는 수동적인 현상에 대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주체의 의도에 따라 사랑은 조각되기도 하고, 명명되거나 일정한 형태로 나아가기 이전에 깨어지기도 한다. 깨어진 파편들은 서로의 온몸 곳곳에 생채기를 낼 것이고, 때때로 커다란 조각은 가슴 한가운데에 박히어 한동안은 대상을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만들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이라 여겨 넘어가거나, 자칫 방심이라도 했다가는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지 알 수가 없다. 늘 경계하고, 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한다. 우리는 연애를, 그러니까 사랑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가 '내가 한 대상을 현재 사랑하고 있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아니고,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해'라는 말은 흔히 오용되면서 동시에 남용되고 있다(나도 여기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심지어 한 대상과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할 때를 떠올려 봐도, 이런 사실들에 대해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저 그 대상의 외적인 정보만을 받아들인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맑은 눈동자, 알맞은 크기의 높은 코, 말할 때 움직이는 작고 예쁜 입술, 그 사이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 웃을 때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 등과 같은 시각적인 정보와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청아하고 일정한 음성, 옷을 쓸어내릴 때 나는 은은한 향기 등의 청각, 후각적 정보들. 대개 우리는 그런 정보들만으로 쉽게 사랑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그런 특정 정보들에 매료되면, 그 대상에 대한 이상화(理想化)를 물 흐르듯 진행시킨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들과는 달라


순간순간 보이는 단점들은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로, 기억에 저장되지도 않고 어디론가 흘려보낸다. 지금까지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상대방의 긍정적인 요소들은 지나치게 확대되고, 부정적인 요소들은 철저히 폐기되거나 축소된다. 그러면서 우리의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까지도 그 대상에게 덧씌워 버린다. 그런 식으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운명적인 사랑은 완성된다. 뭐, 운명적인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연애를 시작할 정도로 꽤 괜찮은 사람은 그런 식으로 우리 머릿속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고백을 하고 연애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이런 이상적인 상태는 꽤나 지속된다. 과연 이런 과정에 대해서 '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유한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한 대상을 바라볼 때 어느 정도로 관념화된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득히 멀리 떨어진 별이나, 해가 저물어갈 때쯤의 석양을 바라볼 때처럼 말이다. 저 별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서 특정 빛깔을 내는지, 태양의 빛이 어떤 식으로 구름과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오는지, 흩어진 구름들에게서 약간의 빛이 어떤 식으로 새어 나오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 채 "예쁘다"라는 관념만을 우리는 스스로의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는가. 애초에 한 대상에 대해서 단번에 구체적이고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반대로 우리는 결코 사랑에 빠질 수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러지 않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저명한 심리학자 칼 융은 이런 일련의 행위를 '투사'라고 정의한다. 온전히 자신에게 내재된 관념적인 무언가를 대상에 투영해 보는 것. 남성에게는 '아니마'라는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고, 여성에게는 '아니무스'라는 남성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서로의 이성에게 자신이 경험적으로 체득한 관념을 투영하는 것이다. 사랑, 연애의 시작은 그렇게 한 대상을 철저히 바라보지 못한 상태로 고도의 관념화와 추상화의 형태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관념화된 대상이 하나의 대상으로 추락해 버리는 것을 머지않아 바로 옆에서 목격하게 된다. 처음에는 몰랐던 부정적인 면들이 보이는가 하면, 축소되어 있던 단점들이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파고들면서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게 한다. 귀엽게만 보였던 어린아이 같은 서투른 젓가락질은 그 사람을 미숙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나에게 칭얼대며 부탁하곤 했던 말투도 독립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 귀찮게만 느껴진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정상화의 과정일 뿐이다. 대상과 친밀해지면서 관념적인 부분들이 탈피되고 그 대상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긍정적인 요소들도 곧잘 발견되곤 하지만, 이상화로 인해 대상이 거대하게 부풀어졌었던 만큼 부정적인 요소인 결점들이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오게 된다. 보통 연애 초반의 헤어짐은 이런 추상화 인플레이션이 버블처럼 터지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연애들은 이런 과정에서 끝맺음을 하기가 쉽다. 지극히 이상적인 것에서 느낄 수 있는 두근거림과 설렘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좀처럼 견디지 못하게 되면서 이별을 고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관념화를 벗어버린 대상은 두근거림과 설렘이 덜할 수는 있으나, 한껏 이상화된 이성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고유성을 갖게 된다. 다소 격앙되거나 긴장된 상태로 서로를 살피던 모습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당당히 날 것 그대로 서로를 관찰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사랑은 제대로 된 방향을 설정한다.


남들이 얼핏 보기에 오뚝하고 날렵하고 예쁘기만 한 코는 자세히 보면 약 5도 정도 왼편으로 휘어있다. 공식 석상에서 예쁘게 웃는 미소와 대비되게 진심으로 장난을 치곤 할 때 터뜨리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다. 집에서 둘이 요리를 해 먹을 때에 종종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맛있다고 이야기하는 만족스러운 표정, 예정되어 있던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하루종일 침대에서만 뒹굴거리는 게으른 모습, 청소를 좀처럼 주기적으로 하지 못하는 모습들은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고유성은 그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현실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고통과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 내 머릿속의 이상적인 그녀와의 미래는 내가 약속을 해서라도 그려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현실 속의 그녀에게 그 확신은 다소 힘을 잃을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사랑이라는 저울대의 시험을 받게 된다. 


이제 사랑에 빠지는 단계는 끝났어. 이런 그녀를(혹은 그를), 그래도 사랑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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