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식어버린 감정의 잔재들 속에서 건져야 할 것들
둘만의 추억, 약속, 계획, 바람, 응원, 열정, 애정, 포용. 모든 것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사랑을 외치고, 뜨겁게 서로의 온몸을 탐닉했던 둘은 더 이상 없다. 남은 것은, 쥘 것을 잃어버린 공허한 손과 좀처럼 열기가 올라오지 않는 착잡한 가슴, 그리고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져버린 사랑의 잔재들이다. 세상사 거의 모든 일들이 겪어나가다 보면 면역이라는 이름 하에 무뎌지기 마련이지만, 이별만큼은 언제 어디서 겪어도 좀처럼 담담하게 서 있기가 힘들다. 언제나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라면, 언제나 그렇다.
고통과 절망의 시간은 필연적으로 견뎌내야 하는 사랑의 남겨진 숙제이다. 연인과 헤어진 뒤 아무렇지 않은 인간만큼 불쌍한 인간이 없다. 그런 인간은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했고, 최선은 더더욱 다하지 못했으며,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가치 없는 시간들을 낭비했을 뿐이니까. 오직 그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이별은 언제나 좌절을 안겨준다. 이별에는 언제나 나름의 이유가 붙기 때문에, 그 이유 때문에라도 약간의 후련함 역시 남게 된다. 어차피 하나가 되기에는 부족했던 두 사람이었기에 이별이라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은 이별 이후의 좌절을 가라앉히는 데에 꽤나 탁월한 치료제가 되어준다.
약간의 후련함 뒤에는 어김없이 몰아낼 수 없는 슬픔이 찾아올 것이다. 회피하려 들면 되려 다음 사랑에까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다음에 맞이할 사랑에게 나의 옛 슬픔을 함부로 떠넘기지 말자. 온전히 스스로의 슬픔에만 잠식당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원을 믿지 않지만 영원하길 바랐던 한 사람과의 사랑의 결말은 오직 스스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하나의 모순이다. 결코 다음 사랑에서의 걸림돌이 될 수 없게끔 꼭꼭 씹어 삼켜내도록 하자.
그런 감정의 되새김질 뒤에는 적절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에게 되물었을 때 지난 사랑에 최선을 다했는지, 상대방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둘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결책을 도모하려 했는지 등을 검토하고 따져보도록 하자. 특정 시점에서 지나치게 이성을 잃어 그 사람을 상처 주지는 않았는지, 다툼에서 회피한답시고 싸움터에 상대방을 홀로 두지는 않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성찰은 스스로가 더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생각해 보니, 다 걔 잘못인데?"
이런 과정 속에서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행위는 지극히 불필요한 행위이다. '아주 희박한 확률로' 한 연애의 모든 싸움이 상대방 잘못일 수 있겠지만, 사랑이 언제나 쌍방이듯 과실은 언제나 쌍방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헐뜯는 것으로는 자기 합리화라는 결론밖에 도출해내지 못한다. 언제나 더 나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행동들은 모조리 접어두도록 하자. 차라리 그럴 바에는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자책하며 반성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오직 나의 잘못, 과오, 실수들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성찰해 나가야 한다.
그런 반성의 과정이 끝나면, 우리는 직전의 연애를 시작하기 전보다 더 성장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더 나은 사랑을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사람에게서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부분들에 대해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부분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더 나은 방법들을 적용해 보며 사랑을 가꾸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별이 마냥 슬픔만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는 양분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곧바로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너무 서두르지는 말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감정의 충전은 언제나 다음 사람을 위한 배려의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났다거나, 자신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다가온다고 무턱대고 덥석 물지는 말자. 지난 사랑이 충분히 지나갔는지, 자신의 감정적인 에너지가 사랑을 주고받기에 충분한 정도에 이르렀는지 확인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과 제대로 된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상처를 안겨주는 어리석은 행동은 굳이 실행에 옮길 필요가 없다. 정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라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한 뒤 유예기간을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별 후에 지나친 좌절로 스스로의 인생을 깎아먹지는 말자. 최선을 다한 사랑 뒤에 실패를 마주하여 입게 된 상처들이 고통스러운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최선의 사랑이 언제나 배신당하는 것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거듭하는 사랑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면, 그런 진심이 통하는 상대는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오직 그런 사랑만이 우리의 인생 속에 사랑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