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오피스 서바이벌] 2탄
햇볕이 창백한 아침, 임아정은 눈을 뜨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복숭아 하나가 전부였다. 복숭아를 우적우적 씹으며 어제 김 부장과의 면담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이달 말까지만..."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아정은 서랍을 열었다. 조울증 약을 꺼냈다. 며칠째 거른 약이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아예 먹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바보 같이 약은 안 먹고 카페인을 선택했었는데,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나. 오늘은 뭔가 달라야 했다.
"나 칼 갈았어."
약을 삼키고 나서 머리가 살짝 아파 탁센도 한 알 먹었다.
'이 조합이 괜찮을까?' 잠깐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털어버렸다. 지금은 몸보다 마음이 더 급했다.
여전히 창백한 햇살의... 출근길 아침.
합정역에서 임아정은 어제 차민경이 보낸 문자에 답을 못한 게 걸려서 회사까지 같이 가자고 문자를 보냈다.
"민경님, 저 지금 합정역인데 어디세요?"
"네, 저도 지금 합정역이에요."
아정과 민경은 참이슬 팀장을 안주삼아 수다를 떨며 신나게 출근했다.
"진짜, 민경님 아니었으면 저...."
"저는요, 아정님 덕분에 회사가 좀 재밌어요. 참이슬 팀장 너무 싫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정은 어제의 충격적인 면담 내용을 쏟아냈다. 김 부장이 "회사랑 한 톨도 안 맞는다"라고 했던 말, "이번 주까지만 더 지켜보겠다"는 마지막 통보까지.
민경은 중간중간 "말도 안 돼", "진짜 어이없네" 하며 공감해줬다.
"아정님이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다른 신입들보다 훨씬 열심히 하시는데."
14층, 적막한 회색빛 사무실 도착.
아정은 곧장 양석진 대리가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대리님! 저 어제 김 부장님이랑 면담했는데요. 앞으로 6일, 저 진짜 불사조처럼 불태울 겁니다!"
양 대리가 기획안을 작성하다 아정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반응했다.
"... 오늘 왜 이리 하이텐션인가요 허허 그래도 아정님은 참 밝아서 좋아."
"어젯밤에 다짐했어요. 제가 부족한 거 인정하고요. 오늘부터 달라질 거예요. 앞으로는 정말 다른 모습 보여드릴 겁니다!"
아정은 랩퍼처럼 말을 쏟아냈다. 양 대리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오늘의 아정님은 초고속 복사기처럼 움직이는군요. 근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네! 컨디션 완전 최고예요!"
그런데 그 복사기에 갑자기 망치가 쿵. 자리에 앉아 오늘의 업무를 가열차게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아팠다.
'뭐지 이 두통은...?'
아정은 잠깐 멈춰서 머리를 만져봤다. 어젯밤 야근을 해서 그런가 싶었지만, 이상했다. 평소와는 다른 종류의 아픔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됐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손끝이 저리고 식은땀이 났다. 속이 메스껍고 금방이라도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민경이 건네준 탁센을 하나 더 먹었지만 오히려 더 심해졌다.
'이거 뭔가 잘못됐는데?'
그때, 참이슬 팀장이 아정의 자리 옆을 스쳤다. 아정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그 특유의 얄미운 목소리, 그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정 씨, 얼굴이 왜 그래? 몸 관리도 업무의 일부라는 거, 모르세요?"
그 한마디가 아정의 머릿속에서 드릴 소리처럼 울려퍼졌다.
'쟤는 사람이냐 악성코드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아정은 자리에서 살포시 일어나 화장실로 초고속 직행했다.
회사 근처 임아정의 힐링스팟, 이영자 약국의 문을 열자마자 의자에 털썩. 아정의 다리는 힘이 이미 풀려 있었다.
"선생님... 저 조울증 약에 탁센 한 알 먹고도 머리 아파서 또 하나 더 먹었는데... 지금 머리가 깨질 것 같고... 토할 것 같고..."
약사 이영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그랬구나. 그 조합은 위험해요. 특히 정신과 약물은 다른 약과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거든요. 회사에 얘기하고 오늘은 푹 쉬세요."
영자의 말을 듣고 나니 아정은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일을 했는지 깨달았다. 약국을 나와 떨리는 손으로 양 대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대리님...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병가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는 그렇게 투지를 불태웠는데 몸이 말을 안 듣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푹 쉬고 와요. 단, 돌아올 땐 진짜 괜찮아져서 오기. 약속."
양 대리의 배려 있는 답장에 아정은 안도했고, 감사했다. 다시 사무실 자리에 가서 보따리를 싸 병원으로 향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은 조용했다.
아정은 담당 의사 김강추 앞에 앉아 어제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놨다.
"선생님, 회사에서 제가 너무 산만하다고 하더라고요. 부장님은 저 때문에 업무에 집중이 안 된다고 하시고..."
"약 복용은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약 복용 불규칙했고, 커피 많이 마셔서... 어제는 흥분 상태였고, 오늘은 토할 것 같고..."
강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래서 오늘 갑자기 약을 복용하고 해열제까지 같이 드시니까 몸에 무리가 온 거예요. 약 용량 조절해 볼게요."
"어제부터 주변 사람들이 제가 너무 흥분해 있다고 계속 얘기해요. 제가 이상한 건가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는 거예요. 2주 분만 처방해 드릴 테니 약물 반응을 지켜보면서 천천히 조절해 나가겠습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프지 마시고 행복하세요."
이제는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는 오후.
아정은 머리가 계속 아팠다. 마사지를 받으면 두통이 조금 낫지않을까 싶어 마사지샵으로 향했다. 마사지샵을 들어서자마자 아로마향이 주는 힐링스멜이 아정에게 안도감을 선물했다. 어깨를 만지던 마사지사 김지희와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어제본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다가 아정의 얘기를 듣던 지희는 깜짝 놀랐다.
"어머, 고객님 저 여태 이십대이신 줄?"
"아뇨, 3학년 7반인데요."
"진짜요? 말도 안 돼. 너무 동안이세요! 피부도 장난 아닌데요? 대체 뭘 드시나요?"
아픈 와중에도 아정의 뺨이 빨개졌다. 동안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은 말이다.
"제가 항상 고등학생 마인드로 살아요...... 요즘 자주 먹는 음식은 월남쌈이랑 케밥 정도?"
"고객님을 보면 이렇게 스스로 챙기시는 거 모습이 진짜 멋져요."
아정은 생각했다. 세상에는 참이슬 같은 악성코드도 있으나, 이렇게 따뜻한 말을 해주는 사람들도 있구나.
영자 선생님도 강추 선생님도 참 따뜻하고 좋다. 다정한 말 한마디. 나를 알아주는 사람 한 사람이 있어도 세상은 더 따뜻해지는구나.
망치로 두들겨 맞은 복사기 하루 대장정의 밤
집에 돌아온 아정은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병원과 마사지샵까지 다녀왔지만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쿠팡이츠에서 배달음식을 주문해 놓고 잠깐 눈을 붙이려다가 정말 기절해 버렸다. 배달 기사님이 와서 벨을 눌러도, 전화 벨소리가 와도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이.
밤 10시경 잠에서 깼고, 허겁지겁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여니 호식이 두 마리 치킨이 문 앞에 식어 방치되어 있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잠이 들었지?'
핸드폰을 확인하니 민경에게서 톡이 와 있었다.
"아정님 몸은 괜찮으세요? 갑자기 조퇴하셨다고 들었는데..."
"응, 괜찮아요. 내일 더 열심히 할게요, 아 다음 주구나....."
"참이슬 팀장이 뭐라 하건 그냥 신경 쓰지 마요. 다시 말하지만, 아정님 잘못 1도 없어요."
민경의 메시지를 보며 아정은 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모든 상황들... 소설로 쓰면 재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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