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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춘 자리에, 또 다른 길이 생긴다

시트콤[오피스 서바이벌] 11탄

by 이빛소금




알 수 없는 세상사

해방차와의 마지막 행사날, 아정은 눈앞의 매대가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서 있었는데도 이상할 만큼 몸이 가벼웠다.

박민하 대표가 말했다.

“아정님, 다음 주에도 시간 괜찮아요? 행사 더 도와주실래요?”

“네! 그럼요!”

돈이 너무 필요했으니, 대답은 거의 반사적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게 굴러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방차의 갑작스러운 공백

행사가 끝난 지 이틀 후, 민하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정님… 우리 다음 달 예산이 좀 꼬였어요.
정규직은 당장은 어렵고, 행사는 한동안 없을 것 같아요.”

아정은 핸드폰을 든 채 멍하니 섰다.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73,400원.


그날 저녁, 아정은 라면을 끓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뭐 하지… 또 귀신같이 일이 끊기네…”

라면을 먹고 난 뒤,

아정은 노트북을 켰다가 껐다가,
일자리를 검색했다가 지우고,
침대에 앉았다가 바닥에 누웠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은 큰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밤이었다.

걱정 때문에 누워서 핸드폰 메모장을

뒤적이다가 발견.


제목: ‘다음 일은 어디에서 찾아온다’


예전에 스스로 적어둔 문장이었다.
그때는 별 감정 없이 써놓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 그래. 다음 일이 또 오겠지.
내가 찾든, 나를 찾든.”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누운 순간—

띠링

핸드폰이 울렸다.

보낸 사람: 신아


“아정이, 혹시 요즘 시간 있어?
카페 알바 자리 하나 있는데… 아정이 너 생각이 딱 났어.”

아정은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이게 다음 문인가.’


그렇게
아정의 인생은 또 한 번
예상 못 한 방향으로 문을 열었다.



루모스 카페 첫 방문

루모스 카페는 동네 언덕 위에 조용히 자리해 있었다.
문을 열자 허브향이 먼저 반겨왔다.

아정은 면접 아닌 면접을 보듯
점장 이나연 앞에 앉았다.

“차 판매 행사 오래 하셨다면서요?”



“네… 대추차, 유자차… 많이 팔았어요.”

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손님 응대는 익숙하겠네요.
수습 3개월 하고, 잘 맞으면 정직원 전환해요.”

“… 바로요?”

“네. 급하게 사람 필요한 상황이라.”

아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정직원 얘기가 나온다고…?’

하지만 입밖으로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날 바로 첫 출근 날짜가 잡혔다.


차를 팔던 시절이 아른하게

출근 전날 밤,
아정은 해방차 행사장에서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사람들에게 차를 권하던 자신,
민하 대표가 건넸던 믿음,
그 덕분에 286만 원을 벌었던 한 달.

노트북엔 그때 썼던 글
‘286만 원의 기적’이 그대로 떠 있었다.

‘그땐 정말… 잘 풀렸었는데.’

아정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커피네.”

웃으며 덧붙였다.

“차에서 커피로 업종 전환이라니…
내 인생 진짜 어디로 가는 거야.”


그리고 루모스 수습생의 첫날

첫 출근 날.
조리대 앞에 서자마자 아정은 현타가 왔다.

우유 스팀, 포스기, 청소, 재고 체크…
차 팔던 시절엔 없던 디테일이 너무 많았다.

점장이 말했다.

“힘들죠? 근데 괜찮아요.
아정 씨 스타일이면 금방 적응해요.”

“네… 해볼게요.”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 벌써 힘든데…’

그렇게 루모스 카페 수습생 아정의 새 일상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시작되었다.




해방차가 멈춘 자리에서
루모스 카페의 문이 열렸다.

아정이 버텼기 때문도,
용감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냥…
인생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다.

그리고 아정은 조금씩 깨닫는다.

멈춘 자리에, 또 다른 길이 생긴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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