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정의만큼 자주 회자되는 게 또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이 주제는 종족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그 밖의 어떤 주제도 더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 사랑은 옛날부터 다루어온 진부한 것임에도 언제까지나 고갈되는 일이 없다.” 저마다 서로 다른 온갖 정의를 가지고 있을 테고, 어처구니 없게도 많은 사람들은 마주 앉은 연인을 두고도 '지금 이게 사랑이 맞는 걸까' 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사랑에 대한 당신의 정의는 무엇인가? 당신 업계의 사람들보다 공감능력 점수를 10배나 더 잘 받았다는 대-챗-지피티 선생께 묻자 이렇게 답한다. "사랑은 상대를 이유로 하여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완전히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 상대의 불완전함·타자성·끝내 해소되지 않는 부분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에 동의하는 태도.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음을 견디는 능력." 내 지피티는 내 문장들로 오염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인다.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어떤 전일성을 꿈꾸며, 동시에 그 기대가 필연적으로 좌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좌절 속에서 나를 내려놓고 참아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희생과 양보, 말하자면 '너에게라면 기꺼이 지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랑과 사랑 아닌 애정을 구별하는 쉬운 리트머스지다. 하지만 그건 사랑의 '증상' 중 하나일 뿐 그 자체가 사랑의 실질인 것은 아니다. '사랑하니까 져주고 싶은' 것이지, '져주고 싶으니까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사랑 그 자체는 내가 상대를 참고 견디고 기다리고 - 이런 마이너스의 감각이 아니라, 찬란한 플러스의 감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플러스에 매료된 까닭에 참고 견디고 기다리고 - 이딴 것들을 기꺼이 감수할 뿐이다. 너무 정확해서 보자마자 마음을 내려앉게 했던 건 니체를 전공한 철학자 사이먼 메이의 정의다.
“무너뜨릴 수 없는 삶의 기반에 대한 희망을 우리 안에 일깨우는 사람과 사물들에게 느끼는 황홀.”
메이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을 원하는 것은 “존재론적 정착”(ontological rootedness)을 찾아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에서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존재론적 정착의 약속만 가능하다면, 다른 자질들이 어떻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들이 … 얼마나 너그럽고 이타적이고 동정심이 넘치는지, 우리 삶과 계획들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는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앞세우는 관심사는 우리 삶과 존재의 고향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향 운운하는 것이 꼭 '너에게 정착하겠다', ‘너를 나의 기반으로 삼겠다’라는 뜻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타적이고 동정심 넘치고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했겠지.) 그보다는, ‘네 안에 있는 자질로부터 존재의 일반적인 기반이 되는 무언가를 발견하겠다‘, ‘너로부터 삶의 정당성에 대한 설명을 듣겠다'는 의미다. 사람이 살아나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렇게 하면 아름다운 거구나, 나도 이렇게 존재하면 되겠구나, 살아도 되겠구나 - 그런 걸 알아차리게 해주는 대상의 눈부심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 따른 약간의 착란상태로, 바라보는 일.
사랑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사랑하는 양태도 상대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연애했던 사람들(두 범주는 같지 않다)과의 관계는 각각이 모두 다른 의미였다. 관계의 중심이 나일 때도 있고 상대일 때도 있었다.
- 누군가는 내 미숙한 시절의 이상자아였다. 누군가는 나보다 용감한 방랑기사로, 자기 모험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었고 나는 신이 나서 들었다. 누군가는 (본인 스스로 비유하기를) 어두운 방 안에 잔잔하게 빛나는 촛불로, 자기를 태워 다정한 위로를 주었다. 누군가와는 천진하게 깔깔거리며 그저 연극을, 전시를, 먼 곳의 예쁜 것들을 보러 다녔다. 누군가는 나를 동경한다 말해주어 내 안의 서사적 창의를 한여름의 빛나는 정원처럼 마음껏 피어나게 해주었다. 기타 등등. -
나는 그중에서 사이먼 메이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만이 사랑이라 느꼈다.
아, 그래서, 당신의 경우. 당신은 내 이데올로기였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이미 이론화되어 있는 진부한 설명일 뿐이다. 근대적 합리주의 이후의 낭만적 사랑이란 신의 대체물을 찾는 일이라는 것. 그것은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나머지 실체 없는 매개만으로도 가능하다.
“신이 내려다보는 거대한 종교 공동체의 세계관이 사멸하자 인간은 ‘그대’에게 손을 뻗쳤다. 그렇다면 현대인이 연애 상대에게 의존하는 것은 영적 이데올로기를 잃은 결과다. ... 그에게는 누군가가, 쇠퇴하는 ‘집단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개인적 정당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 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
혹시 신을 본 적 있는 사람? 애초에 신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여기 없는' 존재(Deus Absconditus)다. 그러니 신의 대체물인 사랑도 실재 없이 성립할 수 있다. 가장 강렬한 사랑은 경험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징적인 사랑이다. 오래 가까이서 온기를 나누는 데서 쌓이는 애틋함이 더 중요하다고? 내 생각에 그렇게 해서 깊어지는 건 친밀감(intimacy)이고, 사랑이 친밀감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조금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을수록, 모를수록 사랑에 유리한 측면도 있다. 흔한 연애조언들이 신비주의를 주창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상징과 환상은 구원의 필요조건이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마술이 있다. 우리 업계의 클라이언트들은 어떤 절차가 일종의 전능한 힘을 가지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다. 그 실질을 아는 우리는 절차는 대개 무력하며 웬만하면 억울하더라도 포기하는 게 이득이라는 걸 안다. 따라서 우리는 절차에 기대를 걸 수 없고 그것으로 위로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문제’에 대한 ‘방법’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무지에 기반한 믿음이 있어야만 교회, 병원, 주점, 학교, 주식거래소, 점집, 도박장, 도서관에 가서 나를 구해달라고, 진짜 희망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은 공동체 유지 수단이었고 현대의학은 아직도 타이레놀의 기전조차 밝히지 못했으며 주식 매수란 그 개념상 내 돈을 빌려드릴 테니 사업이 망하면 안 갚으셔도 됩니다 라고 말하는 행위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저요)은 방법이 없다(소위 ‘구제불능’).
처음 그에게 갈 때는, 그의 분야는 여전히 내가 전혀 모르는 영역으로서 그래도 뭔가 좀 더 단단한 원리가 있을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법원에 오는 사람들이 판사가 당연히 자기 관점에서의 ‘정의’를 마법처럼 실현시켜줄 거라고 기대하고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의사라면 당연히 내 병을 마법처럼 '치유'해줄 거라고 기대하듯이 나도, 시작과 끝이 깨끗하게 맞물리는 설명, 딱 떨어지는 해답 같은 것을 막연히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세계 언저리에서 수상한 딜레탕트 노릇을 몇 년 하고 나서 - 어쩌다 보니 나는 인접 분야의 대학원 수업까지 듣고 다녔던 것인데,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대체 이런 걸 왜 공부하고 있냐고 물어서 나는 매번 돌리 앨더튼 소설의 대사를 떠올렸다. Why do you keep doing this? LOVE, I think, unrequited love. Come dance with me. - 나는 이제 그의 분과에 대한 순진한 믿음도 잃어버렸다. 주술호응조차 맞지 않는 계획서를 들고 혼란변수를 제거하려고 허둥대는 그들도 신이 아님을 안다. 내가 절절히 미화하는 그의 그 모든 신중함과 배려 따위도 그 첫번째 원천은 순전히 두려움이라는 것, 즉 전부 자기방어일 뿐이라는 것, 그런 건 사실 처음부터 알았다. 인간은 모두 겁에 질려 있다. 그중에서 자기 두려움에 그렇게 아름답게 맞서싸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가웠을 뿐.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조셉 콘라드의 표현대로 그저 “a long fool’s errand to the grave”가 아니라 좀 더 괜찮을 것일 수 있겠네, 싶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나는 마술 없는 무신론자다. 마술 없는 무신론자는 무엇에 기대어 사는가? 인식과 의지?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분명한 것은 - 내게 남은 것은 극도로 미화된 상징들이 아니라, 그저 내게 보이는 만큼의 너에 대한 투명한 존경으로서의 사랑이다. 요즘은 ‘존경할 수 있는 남자가 이상형이야‘라는 말이 ’날 먹여살릴 돈 많은 남자를 소개시켜줘‘라는 뜻이라지? 그런데 에리히 프롬이 정의하는 존경은 뜻이 완전히 반대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못 믿겠지만, 너에게 가당치 않게 구원 같은 것을 바란 적 없다. 일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으로서는. 피차 잘 알다시피 그런 것까지 망상하기에는 현실의 우리가 서로 멀어도 너무 멀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타인에게 그런 걸 바라는 무력한 인간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저 살아가는 일에 대한 어떤 기준을 발견했을 뿐이다. 너를 알게 되어서 기뻤을 뿐이다. 네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늘 너로서 끝없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증발하는 물 분자처럼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를 바란다. 네게도 있을 때때로의 저열한 충동과 유치한 욕심까지 포함해서 가지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에 매순간 더 가까워지면서 너 자신으로서 무한히 피어나고 확장되기를 바란다. 그런 식으로 너를 존경한다.
네가 너무 좋아서, 이 세상에 네가 더 많기를 바래. 남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기를 바래. 너의 눈매며 손가락 같은 게 다음 세대로 이어지길 바래. 벅차게 좋은 감정들을 많이 담아서 마음이 가득 찬 너로 살기를 바래.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좋은 영향으로 남길 바래. 너의 말이 더 많이 받아적히기를 바래. 신문에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래. 네 생각의 흔적들이 도서관에 영원히 남고 미친듯이 많이 인용되기를 바래. 나 말고 또 누가 너를 열렬히 사랑하기를 바래. 내 꿈에도 종종 네가 있길 바래. 너를 사랑해.
오래된 대문의 아치 아래를 통과하자마자 나는 전율에 사로잡혔고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한기를 느꼈다. 그럼에도 계속 갔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내가 본 환영 가운데서 유독 강렬하게 기억나는 작은 부분을. 그 무언가는 그곳에 있었다.
별 모양 램프를 통과해 도로 위에 떨어진 한 조각 무지개 빛이.
- 조지 엘리엇, <벗겨진 베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