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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굴러떨어진다

어제 한 여자 환자분이 오셨다. 굵은 주사 바늘을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혈관이 안 보이는데다가 탄력이 없었다. 거기다 전반적으로 살집이 있는 분이라 엎친데 덮친 격이였다.


천천히 혈관을 확인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어느 팔이 더 수월한지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확인하는데, 그 과정이 환자에게 불신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에 환자의 심적 동요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 신중히 봐서 한번만에 끝내려고 한 행동인데, 극도로 불안해하시며 나한테 초보냐고 묻는 분도 있었다. 그래서 그 후로 꼭 이렇게 말한다.


주사바늘을 밀어넣고 수액을 연결했는데 잘 들어가서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환자는 통증을 호소했다. 붓는 것이 없어서 괜찮았는데 이렇게 아파할정도면 얼른 빼야한다. 죄송하다 하고 지혈을 했다. 다시 한 번 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두번째 라인 잡기. 이곳에 혈관이 있겠다 판단하고 바늘을 넣었는데 앞에서 뭐가 막힌다.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지. 환자는 나를 불신할것이다. 최악이다. 다시 한번 사과하고 바늘을 뺐다.


역시나 그분은 나보고 몇년차냐고 물어봤다. 사년 가량 됐다고 했다. 환자분의 자식도 간호사를 하다 힘들어서 그만둔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해한다는 뉘앙스였다.


잘하는 간호사 없냐고 물어서, 나보다 높은 직급의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봐도 이분은 혈관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라인은 잘 잡혔고, 수액을 연결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시자마자 환자의 팔이 붓기 시작했다. 바로 바늘을 뺐다. 총체적 난국이였다.


그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른 병원에서는 한번만에 피 뽑던데... 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검사를 해야하므로 굵은 바늘을 잡는 것이고 피검사를 하는 바늘은 훨씬 얇기 때문에 저 역시 그건 한번만에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분은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다. 사실 이렇게 말은 했는데.. 뭔가 죄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 바깥에서 어떤 분이 병원이 흔들릴정도로 고성방가를 하고 있었다. 환자는 불안했는지 저분 왜 저러냐고, 의료사고 난 거 아니냐며 나한테 물어왔다.


아.. 그야말로 최악이다. 갑자기 의료사고라니. 그냥 난, 아니 우리 병원은, 그분에게 어떤 이미지가 된 것인가? 괜히 내 탓만 같았다.


의료사고 난 적 없다. 저는 이 곳에만 있어서 저분이 어떤 이유로 목소리가 커진 지는 모르겠다. 이곳은 수많은 환자들을 대면하며 진료를 보는 곳이다. 사람의 성향은 메우 다양하다. 말 한 마디에 오해가 쌓여 그것이 눈덩이만치 불어나면 가끔 저런 상황이 발생하더라. 흔한 일은 아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리 지른 사람은 진상이였다. 저번에 돈을 덜 내서, 돈을 내라고 했는데, 나는 절대로 못 그런다며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이였다. 세상엔 상상이상의 사람이 많다.)


적다 보니 자꾸 어제의 일이 떠오른다. 더이상 복기하고 싶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결국 못 찔렀고, 검사를 못했다. 아마도 큰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결과지나 CD를 들고오실 듯하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였다. 일단, 내가 이렇게 시도해도 못 찌르는건 육개월에 한번 정도 있는 일이다. 그럴땐 선배 간호사에게 양해를 구했고 그분들은 손을 바꿔 주셨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간호사 인생 통틀어서 처음 있는 일이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직 수련이 덜됐구나. 하지만 환자분 혈관 상태가 좋지 않은걸...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변명거리밖에 안되고 컴플레인만 백만번 걸리겠지. 그냥 여러 요인이 짬뽕되어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낸것이다.


화도 내지 않고 가셨다. 그분은. 그래서 더 마음이 먹먹했다. 사람한테 못할 짓을 한 기분이였다. 그걸 세글자로 말하면 죄책감이라고 하지. 차라리 욕을 들어먹으면 내가 분하다. 그 순간에는 엄청 짜증나는데 한달만 지나도 어떤 욕을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죄책감이라는건 상대방의 잘못은 전혀 없고, 오직 나만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는거다. 두고두고 생각나고 기억나고 떠오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것조차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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